남정옥 박사 칼럼 : 차일혁의 삶과 꿈 62.

남정옥 박사 칼럼

남정옥 박사 칼럼 : 차일혁의 삶과 꿈 62.

관리자 0 698 2020.08.03 16:09

최후를 앞둔 빨치산총수 이현상이 보낸 밀사(密使)를 만나다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車一赫)과 ‘빨치산총수’ 이현상(李鉉相)은 라이벌 관계였다. 그것도 게릴라전에서다. 게릴라전이라면 두 사람 모두 일가견이 있었다. 두 사람은 다년간 국내외에서 게릴라전 경험을 쌓았다. 목숨을 내건 실전경험이었다. 차일혁은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했고, 이현상은 일제시대 탄압을 피해 덕유산으로 들어가 게릴라 전술을 터득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게릴라전에는 차이가 있다. 차일혁은 중국대륙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현대전의 게릴라전술을 배운 반면, 이현상은 국내에서 나름 게릴라전을 습득했다. 스스로 익힌 게릴라 전술이었다.

그러던 두 사람의 운명은 광복 후 갈라졌다. 전혀 다른 길로 들어섰다. 인생의 항로가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이현상은 공산주의와 남로당(南勞黨, 남조선노동당의 준말) 당수 박헌영(朴憲永)을 위해서 싸웠고, 차일혁은 자유민주주의와 조국 그리고 민족을 위해서 싸웠다. 그래서 차일혁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싸웠던 동지들을 따라 북한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조국,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싸웠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은 국내에 남아있던 일본 악질형사를 처단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호국군과 청년방위대 활동을 하며 건군활동에 참여했다.

반면 이현상은 철저히 공산주의 길을 걸었다. 광복 후 이현상은 조선공산당의 당수인 박헌영이 만든 남로당에 들어가 본격적인 공산 활동을 하게 됐고, 급기야는 공산당의 전위(前衛) 행동부대인 국군준비대(國軍準備隊)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막후에서 조정하며, 해방공간에서 군사지도자로 부상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여수 제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 세력이 일으킨 여순 10·19사건 때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남로당 잔당들이 대한민국 군경(軍警)의 토벌로 지리산 등으로 숨어들자, 이현상은 이들 잔당(殘黨)들을 규합하여 대한민국 후방지역에서 공산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빨치산활동이었다. 이현상은 이들 잔당들을 이끌고 6·25전쟁 때까지 버텨냈다. 실로 2년여 세월이었다. 게릴라전에서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은 비록 적이었지만, 이현상의 그런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차일혁의 판단으로 한반도는 게릴라 활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한반도, 그중에서도 남한지역은 게릴라전에 매우 부적합했다. 게릴라전을 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최소한 게릴라 활동을 하려면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 공산당이 활동한 중국처럼 광활한 지역이 필요한데, 한반도는 그렇지 못했다. 협소하면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내륙은 어디든 4시간 거리에 위치했다. 또 겨울철에는 아무리 산악지형이라고 해도 낙엽이 지기 때문에 활동이 쉽게 노출됨으로써 장기적인 게릴라 활동에는 아주 부적합했다. 거기다 식량과 탄약을 공급받기가 어려웠다. 그냥 소수 인원이 도피처로서 숨어 지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많은 병력이 장기간에 걸쳐 게릴라전을 펼치기에 부적당했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 그것도 이현상의 게릴라 활동무대가 됐던 지리산과 덕유산 그리고 회문산 등은 게릴라전을 해서는 안 될 곳이었다. 이현상은 그런 악조건 하에서 6·25이전부터 휴전 후까지 살아남았다. 그것도 군과 경찰을 위협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차일혁은 그런 이현상의 게릴라전을 경이롭게 보며 높이 평가했다.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은 적과 아군을 떠나서 게릴라전 수행능력을 봤을 때 이현상을 대단한 존재로 평가했다. 게릴라전을 통해 차일혁이 이현상을 높이 평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충남(당시는 전북) 금산 출신의 이현상은 전북 고창고보와 중앙고보를 다녔고, 그 후 보성전문을 들어갔다가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덕유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때 이현상은 덕유산과 회문산 등을 오가며 그곳 산세를 익혔고, 또 징병을 피해 숨어든 다른 학생들을 이끌며 나름 게릴라 활동을 했다. 재산(在山) 학생들의 지도자가 됐다. 그리고 게릴라전술에 대해서도 학습을 했다. 그러던 차 이현상은 나름 ‘귀한 사람’을 만났다. 경남 함안사람으로 사냥꾼인 산중 포수(砲手) 장팔이라는 사람이었다. 이현상은 장팔로부터 사냥법을 익히며 그곳 산악지형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됐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현상은 나름의 게릴라 전법을 정립하게 됐다. 후에 이현상이 ‘남부군총수’가 됐을 때 그때의 경험은 많은 도움이 됐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현상은 광복을 맞게 됐다. 광복 후 이현상은 ‘노동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며 공산주의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던 차 이현상은 그간 공로를 인정받아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게 됐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하나의 특전이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이현상은 평양에서 유학을 기다리던 중 하루는 김일성의 심기를 거슬리는 발언으로 모스크바 유학이 취소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됐다. 이에 박헌영의 주선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남한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됐다. 이현상은 그런 연유로 다시 남으로 내려와 게릴라 활동에 하게 됐다.

 

이현상의 게릴라 활동은 여순 10·19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6·25전쟁 이전 이현상은 250명에서 300명에 달하는 이른바 ‘구(舊)빨치’라고 하는 야산대(野山隊)를 이끌고, 오랜 세월 버티어 냈다. 차일혁은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현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현상은 군경의 끈질긴 추격 속에서 무주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현상 특유의 기습과 대담함이었다. 게릴라전의 명수인 차일혁이 특히 인정한 부분이다. 이현상은 6·25전쟁 이전 무주를 점령한 후 충남도당위원장에 추대됐다. 이현상의 입지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얘기가 된다.

특히 차일혁이 게릴라전에서 이현상을 높이 평가한 것은 6·25전쟁 중에 일어났던 충북도청 소재지인 청주 습격이었다. 1951년 5월 27일 일요일에 벌어진 이현상 부대의 청주습격은 대한민국을 놀라게 했던 최대의 사건 중 하나였다. 그 여파로 충북도경국장이 경질되고, 경비과장이 해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현상 다운 전격적인 기습작전이었다. 차일혁이 보기에 이현상의 장점은 여럿 있었다. 빨치산 활동 초기 이현상은 불필요한 인명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전투과정 죽인 군경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포로로 잡힌 군경에 대해서는 무기만 회수하고 살려서 보내줬다. 그런 점은 차일혁을 닮았다. 그런데 이현상은 어느 때부터 그렇지 않았다. 이현상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이현상 부대는 군경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다른 빨치산들과 마찬가지로 잔인해졌다.

그 과정에서 이현상은 종전의 게릴라 전법에서 벗어난 행동까지 했다. 이전의 공격이 대담한 기습을 통한 소규모 게릴라전이었다면, 이현상의 말기에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정규전에 가까운 군사행동을 했다. 많은 병력이 떼를 지어 다니며 군경을 공격했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이런 돌발적이고 돌출적인 행동을 의아하게 여겼다. 그런데 차일혁이 심도있게 분석한 결과, 이현상의 그런 돌출 행동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북한에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과시이자 시위였다. 남로당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과도하게 행동했다. 그것이 정규전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 북에서는 이현상의 공산주의 스승이나 다름없던 박헌영과 이승엽 및 이강국 등이 숙청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현상은 북한에 메시지를 보냈다. 남로당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이현상은 북에서도 버림받고 남에서는 쫓기는 신세가 됐다. 북에서는 이현상의 남부군을 포기했다. 이른바 고사작전이었다. 그때 남쪽에서도 이현상을 버리게 됐다.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무렵 남한에서도 빨치산을 이끌던 이현상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그에 따라 이현상은 모든 당직(黨職)에서 물러나고, 빨치산에 대한 지휘권도 잃게 됐다. 평당원이 된 것이다. 그때가 1953년 8월경이다. 이현상이 차일혁 부대에게 사살되기 1개월 전이다. 그 순간 이현상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그는 지리산에서 아무것도 아닌 미미한 존재로 전락했다. ‘빨치산 총수’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한때 지리산을 호령했던 남부군총수 이현상은 이제 사라졌다. 다만 초라하게 변한 늙은 빨치산 이현상만이 존재했다. 당시 이현상은 북으로부터 버림받고, 남으로 부터는 쫓기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이때 이현상에게는 산중에서 얻은 처(妻)였던 하(河)씨 성을 가진 여인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그 여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배속에 이현상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이현상도 한 나약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최후가 왔다고 생각한 이현상은 모종의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현상이 그렇게 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자신의 여인과 아이를 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혹여 가능하다면 자신도 자수하여 목숨을 부지할 생각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현상은 자신을 잡기 위해 하동에 내려와 있던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현상은 차일혁만큼은 믿음이 갔다. 자신이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았다. 차일혁과 이현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차일혁도 알고 있었고, 이현상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게릴라전의 고수였다. 그러기에 이현상은 자신의 마지막을 차일혁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나설 수는 없었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 자신의 의중을 차일혁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비밀리에 차일혁에게 보낼 밀사가 필요했다.

밀사는 상대에게 믿음이 가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현상이 차일혁에게 자신의 아이를 갖고 있는 산중의 처를 밀사로 보내기로 한 것은 위험스런 일이었지만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닌가 한다. 그러면 자신도 살고, 산중의 처와 아이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현상은 절박했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산중의 처를 만난 후 이현상과 만나려고 했다. 그래서 차일혁이 가장 신임했던 제1대대장 김동진 경감을 접선 장소로 보냈는데, 이현상의 그런 ‘불순한 의도’를 눈치 낸 빨치산 강경파들에 의해 김동진 대대장 일행이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차일혁의 수기에 따르면 작전명령을 무시하고 진출경계선을 벗어났다가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아마 차일혁의 특명을 받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때까지 그런 상황을 몰랐던 차일혁은 이현상의 간계에 빠진 것으로 알았다. 차일혁은 이현상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이현상의 측근으로 있던 이형련을 통해 이현상의 행방을 알게 됐다.

이형련은 섬진강을 건너다 2연대수색대에 발각되어 발뒤꿈치에 총상을 맞고 이를 성냥개비를 이용하여 밤에 치료하다가 그 불빛을 본 차일혁의 수색대에 의해 붙잡혔다. 이형련은 경성의전을 나온 수재로 여수에서 의사로 있었는데 남로당에 의해 여순 제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여기에 가담하면서 빨치산으로 들어와 이현상의 측근이 됐던 인물이다. 차일혁은 이형련을 통해 이현상의 행방을 대략적으로 알게 되자 포위망을 압축해 갔고, 결국 1953년 9월 18일 이현상은 차일혁 부대에 의해 최후를 마치게 됐다. 한때 지리산을 떨게 했던 이현상의 초라한 죽음이었다. 차일혁은 이현상이 죽은 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것은 바로 이현상의 산중의 처이자 자신에게 밀사로 왔던 하씨 성을 가진 그 여인에 의해서였다.

이현상의 산중 여인은 이현상이 죽기 전 하동에 있던 차일혁 부대로 찾아왔다. 그때는 만삭의 몸이었다. 차일혁은 그런 이현상의 여인을 부대에서 아이를 낳게 했다. 그때가 1953년 12월의 추운 겨울이었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산중의 처가 아이를 순산하도록 도움을 줬고, 순산 후 4개월 동안 부대에 머물게 해줬다. 아기를 위해서다. 그런 후 이현상의 산중의 처를 교도소로 보냈다. 이현상의 여인은 1년 4개월 정도 복역한 후 풀려나 부산 사상에서 살았고, 그녀의 아들은 나중에 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현상의 여인은 차일혁이 죽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 차일혁의 유족에게 그때의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이현상의 가족에 대해서는 1980년대 일부 소개가 된 적이 있지만 차일혁의 수기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현상 묘비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고, 이현상의 막내딸 이상진은 북한 최초의 여성 일등서기관으로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평양 만수대의사당 안내를 맡았다.

이현상이 차일혁 부대에 의해 사살되자,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군경간의 훈장 다툼이었다. 서로가 이현상을 죽였다고 했다. 결국 경찰이 승리했다. 이제는 경찰내에서 서로 태극무공훈장을 놓고 싸웠다. 여기에 이현상 사살과 전연 관련이 없는 내무부장관, 치안국장,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관이 나섰다. 정작 태극무공훈장을 받을 차일혁은 빠져 있었다. 결국 이현상 사살로 내무부장관과 치안국장 그리고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관 등 3명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한 전투에서 3명이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경찰수뇌부에서는 차일혁에게 미안했던지 격이 훨씬 떨어진 무공훈장을 하나 줬다. 그런 훈장 다툼을 보고 차일혁이 한마디 내질렀다. “누가 이현상을 사살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현상이 과연 누구고 그를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리고 이현상이 어떻게 싸웠는지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일갈했다. 차일혁다운 일침이었다.


이현상의 사체(死體)는 즉시 서울로 올려 져 시민들에게 공개된 후 친척들에게 인계됐다. 하지만 친척들 중 인수자가 나서지 않아 죽어서도 가엾은 신세가 된 이현상의 장례식을 차일혁이 맡게 됐다. 그때 차일혁의 그런 행동에 경찰 주변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차일혁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장례를 강행했다. 당시는 반공이 국시(國是)였던 터라 비록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지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군경에서는 여전히 반공(反共)과 멸공(滅共) 그리고 승공(勝共)을 부르짖던 시절이었다. 반공국가 대한민국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후방을 교란하며 많은 군경과 양민들을 희생시켰던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의 장례를 경찰의 고위 직책에 있던 차일혁이 치러주는 것은 여러모로 부적절했다. 그렇지만 차일혁은 그런 것에 연연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런 것에는 전혀 계산이 없는 차일혁이었다. 차일혁은 주변에서 강력히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당당하게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줬다. 차일혁은 자신의 권총을 뽑아 조총을 대신했고, 스님을 불러 넋을 달래주는 염불까지 외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차일혁은 타다 남은 이현상의 유골은 자신의 철모에 넣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

차일혁의 그런 행위는 그의 앞날에 평생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현상의 산중의 처를 부대로 데려와 아이를 낳게 해준 것도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닌데, 거기에 빨치산 총수였던 이현상의 장례까지 치러줬으니 차일혁의 입지는 매우 어렵게 됐다. 더욱이 차일혁은 유난히 많은 빨치산출신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차일혁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갈 데 없는 빨치산출신 부하들을 끝까지 챙겨주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계속 입방아를 찧어댔다. 차일혁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결국 차일혁은 이현상의 처와 이현상 장례로 인해 시기하고 시샘하는 사람들로부터 ‘공산당’ 또는 ‘공산당을 비호하는 사람’으로 점차 몰리게 됐다. 실제로 그런 음해는 계속됐다.

빨치산토벌대장이 ‘빨치산총수’ 이현상을 사살하고, 오히려 공산당으로 몰리는 기이한 형국이 됐다. 이현상을 죽여 지리산의 평화와 대한민국 후방에 안정을 가져온 차일혁에게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심지가 굳은 차일혁도 그런 시대의 거센 물결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사회분위기가 그랬다. 거기다 차일혁을 음해하는 세력들의 공작은 집요했다. 차일혁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단순히 차일혁 자신에게만 그 피해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나아가 자신이 아끼고 신뢰했던 부하 및 상관들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칠 것이 분명했다. 그때가 1958년이었다. 차일혁은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는 차일혁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무관치 않다. 차일혁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안은 채 훌훌 털어버리고 홀로 떠났다. 빨치산토벌대장 차일혁 다운 ‘의연한 죽음’이었다. 모두를 위해 차일혁은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났다.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차일혁을 보고 이현상과 그의 유족들은 얼마나 안타까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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