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회향 (4)

소설 ‘애정산맥’

16. 회향 (4)

관리자 0 625 2020.08.10 17:25

16. 회향 (4)



그런 그자와 이모의 빈소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자본가 타도를 외치면서 가진 자에게라면 맹렬한 증오심만을 보내는 그자들이 이모와 같은 준 재벌급 자본가의 빈소에 나타난 것은 의외였다. 설사 고인과 이런저런 연유로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주제를 파악해서 나타나지 말았어야 하는 게 옳은 일 아니었을까? 도대체 그 작자들이 그곳에 나타난 저의 또한 괘씸했다.

 

나는 이모가 간간이 장기수들을 위해 적지 않은 금품을 희사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었다. 그거야 자신의 과거동료들에 대한 인정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말이 나면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모에게도 덮어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이모도 그 일을 쉬쉬하고 있는 듯했다그런데 오늘 그런 작자들이 그곳에까지 나타났으니 이모의 영정에 먹칠을 한 꼴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괜히 이중기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스스로를 애써 합리화하려는 과잉반응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되물음이 일었다대학다닐 때 이중기는 학교 전체가 알아주는 똑똑한 청년이었다. 총학생회장에 출마했던 그의 정견 발표를 들으면서 나도 고개를 주억거리곤 했었다.

 

이모는 죽는 순간까지도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지 않는가. 그래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신으로서는 외아들인 상경에게 그토록 볼멘 소리를 듣고 있지 않는가도대체 상경은 내 동생이란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내 동생이라면 돌아가시는 마당에 밝히려 하지 않았을까. 하긴 평지풍파를 일으킬 사안이기 때문에 끝까지 덮어두고 가셨는지도 모를 일이었다상경 또한 분명 그와 관련해 무언가 혼자 고민했던 흔적이 역력했다. 오늘의 태도를 보면 확실했다무언가 의미를 찾으려 하느냐구? 괘씸한 자식, 형에 대한 태도가 그처럼 불공스럽다니……오늘 이모다 돌아가신 날만 아니었다면 그냥…….


그런데 어제 아침 전화 속에서 울려나왔던 이모의 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차 대장과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사랑을 했어. 태민아, 이 점 잘 알아둬. 그 분은 세속의 상식을 초월한 대범한 분이셨지만 세속의 도덕률에도 한점 어긋남없이 깨끗하게 사셨던 불꽃 같은 분이셨어. 그 분은 부끄러운 게 없는 분이시란다. 알았니?”

아버지가 세속의 도덕률에도 한점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이모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모는 상경을 두고 내가 품고 있는 의문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랬기 때문에 난데없이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닌가그럼 그날 아버지와 이모가 유성의 만년장에서 만나셨던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두 분이서만 어린 나를 밖에서 4시간 가까이 기다리게 하면서 두 사람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돌아가신 두 분을 놓고 하는 상상치고는 너무도 불경스런 상상이라 생각하면서도 의문을 풀 길 없어 나의 상상의 나래는 더욱 은밀하게 펼쳐졌다.


그때 여관에서 나오던 이모의 머리는 젖어 있었다. 목욕을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모처럼 찾은 온천장이기 때문에 단순히 목욕만을 했을까? 가슴속에 맺혀 있는 사연들을 토로하고 났을 때 두 분은 엄습하는 피로를 느꼈고 교대로 목욕을 했을 수는 있었다두 분의 사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깨끗했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상경은 조 사장의 아들일 수도 있다그러나 성인남녀가 그것도 한쪽은 가정을 갖고 있고 또 한쪽은 결혼을 며칠 앞둔 사람들이 여관에서 은밀히 만나는 일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일일까내 생각으로는 그날 아니 그 전에라도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고, 또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는데……. 왜 이모는 굳이 마지막 순간에 그 얘기를 해가지고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일까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다?


갑자기 강혜련의 생각이 떠오른다강혜련과의 만남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인생에 영원히 남을 화려한 축제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지난 1985년 늦봄의 일이었는데도 마치 전생의 일처럼 아련하게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그녀를 만난 것은 마치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강혜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재미교포였다. 그녀는 당시 36세의 완숙한 여인이었다나는 그때 아버지의 수기를 출판하겠다는 생각에 원고를 출판사에 맡긴 일이 있었다강혜련은 그 출판사 젊은 편집장의 사촌누이였다.


하루는 그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차 선생님, 우리 사촌누이가 한번 꼭 뵙고 싶어하는데요.”

이런저런 안부며 출판 진행사항에 관한 이야기 끝에 편집장이 그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이 부장 누님이?”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저희 이모부가 빨치산 간부 강성철입니다.”

강성철 씨?”

, 그래. 기억나는군. 그런데 그분의 따님이 왜 나를?”

누님은 지금 미국에 살고 계신데 돌아가신 저희 이모님이 평소부터 차 대장님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차 대장님이 사살된 남편의 시신을 잘 묻어주었다구요. 마침 누이가 한국에 나와 있는데 한번 만났으면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래? 그럼 이 부장이 시간을 한번 만들어보구료.”


당초 나는 아버지 차 대장의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는 빨치산의 딸을 만나본다는 호기심어린 생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지니지 않고 덤덤하게 응했던 것이다전화를 끊고 나는 내가 보관하고 있는 아버지의 진중일기의 사본 가운데 강성철 씨 부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꼼꼼한 아버지가 빨치산 간부였던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그러나 그 생각은 곧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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