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회향 (3)

소설 ‘애정산맥’

16. 회향 (3)

관리자 0 636 2020.08.10 17:20

16. 회향 (3)



빈소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모와 조 사장네 집안이 세운 전라학원 한서대학 사람들이 제일 먼저 몰려들고 있었다.

제지업으로 재산을 일군 이모네는 그때 한창 주가를 날리던 플라스틱 제품 제조업에 뛰어들었고, 그 사업 역시 일취월장으로 성공을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학교재단을 인수해 요즘엔 지방명문으로 꼽히는 대학까지 설립했었다밀려드는 사람들에게 빈소 앞 돗자리를 양보하느라 물러서려는데 저만큼에 넋을 잃고 서 있는 상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은 너무도 초췌했고 까칠했다. 며칠밤을 세웠을 테고 끼니도 제대로 찾지 못했을 것이 뻔했다내가 그쪽으로 갔다.

뭐 좀 먹고 기운차려야지.”

?”

상경이 이상한 말도 다한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돌아가신 분은 돌아가셨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래야 장례도 치르는 것 아니야.”
남들이 이런 순간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흉물스런 말이라고 혐오했었는데 지금 내가 그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빈소는 자신이 지킬 테니 걱정 말고 기운 좀 차리고 오라는 호경의 권유도 있었기에, 거의 우격다짐으로 상경을 끌고나와 원남동 로터리쪽 허름한 한식집 탁자에 마주앉았다.


병원 빈소에서마다 온 손님들 때문인지 식당은 꽤 붐비고 왁자지껄했다. 눈이 빨개져 있는 소복차림의 여인네며 조장을 가슴에 단 사내들도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사는 게 뭐고 죽었다는 게 뭔지 인생이 숫제 삶과 죽음이 범벅이 된 희극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탁자에 앉아서도 상경은 말이 없었다. 따로 난 좌석이 없어 합석을 해야 했기에 옆사람들이 신경쓰이기도 했다.

어차피 각오했던 일 아니니? 더 고생 안하시고 그렇게 깨끗하게 돌아가셨으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지, .”

나 자신에게 말하는 기분으로 내가 입을 열었다상경은 날라져온 국밥에 두어 번 숟갈을 갖다대더니 이내 조용히 숟갈을 내려놓았다.

그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다른 말씀 안하시대?”

나는 상경에게 더 먹을 것을 강요하지는 않고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다른 말씀이야 뭐 있겠어요? 맨 형네 아버지 차 대장 얘기만 하십디다.”

상경이 남의 얘기하듯 감정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형네 아버지 차 대장이란 말이 음절음절마다 비수가 된 듯 내 가슴에 꽂혔지만, 내색은 않고 내가 다시 물었다.

그래? 뭐라고 하셨는데?”

차 대장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행복하시대요.”

그 말을 너한테만 하시대? 아니면 다른 사람들 다 있는데서도 그러시대?”

왜 형은 거기서 무슨 의미를 찾으려 하시는 겁니까? 다른 사람 다 있는 데서 그랬습니다.”

상당히 도전적인 어투였다.

의미는 무슨 의미…….”

나는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상경이 갑자기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반쯤이나 남기고 간 소줏병을 들어 자신의 물잔에 따라 벌컥 마셨다. 너무 자연스럽고 순간적인 동작이었기에 내가 시늉이라도 따라주려 하거나 잔에 손을 댈 틈도 없었다.

우리 아버진 뭡니까? 평생을 어머니 껍데기하고 살았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렇게 차 대장, 차 대장 하시더니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그러시다니……. 우리 아버지가 불쌍합니다.”

나는 웬지 심하게 역정이 났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 이모는 너희 아버지한테도 끔찍하게 잘하셨잖아? 어디 빠지는 구석 있었냐?”

녀석의 완강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그만 그의 뜻대로 그를 조 사장의 아들로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잘했다구요? 형은 몰라요. 아버지가 얼마나 속상해하셨는지…….”

하긴 나야 정아 이모와 조 사장의 사이를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았기 때문에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정아 이모에게 있어서 차동혁이란 인물은 실제의 인물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상상 속의 미화된 존재가 아니었을까? 실제로도 차 대장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잖아. 누이동생이 일찍 숨진 오빠를 그리워하는 그런 애틋한 마음으로 이해할 순 없을까?”

내 말에 상경은 더 이상 대답은 않고 소주를 한잔 더 따라마셨다. 그러나 이번엔 물잔에 반도 차지 않았다

언젠가 이모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지. ()은 피어있기에 아름다운 것이지, 내 것이기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이 말이 이모의 심경을 아주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상경은 아무 대답없이 빈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한잔 더 할래?”

내가 물었다.

됐어요, 형님이나 하시려면 하세요.”

녀석의 목소리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아니야, 나도 됐어. 그럼 들어가보자.”

 

오후 무렵 대학병원 빈소를 나서는 나는 도무지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수채화 물감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물을 흠뻑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이모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슬픔, 상경이 내 동생이 아니라고 완강하게 나오는 것에 대한 배신감도 아니고 혼란감도 아닌 야릇한 감정, 이모와 조 사장의 사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는 얘기가 주는 묘한 여운…….

게다가 빈소를 나서다 마주친 이름도 안다고 하기 싫은 이 뭐라고 하는 영 기분 나쁜 작자 때문에 내 감정은 더 착잡해지고 헝클어져 있었다. 소위 운동권자로 알려져 있는 그 작자의 이름은 사실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중기였다. 나와는 대학동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가 물으면 내가 그런 작자 어떻게 알아?’하고 내뱉을만큼 거북한 작자였다그런데 그자가 이모의 조문객으로 빈소를 찾은 것이다. 나와 얼굴이 마주쳤을 때 그자의 얼굴에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적으로 표정을 바꾼 그가 나에게 아는 체를 하면서 악수를 건넬 태세였지만 나는 싹 외면하고 돌아서버렸다.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그 또한 나 자신이 졸렬했다고 느껴지는 게 영 개운치가 않았다.


운동권의 활동가로 알려져 있는 그는 장기수 돕기회민주구속인사 돕기회등의 단체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내가 그자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몇 년 전 연말쯤 우리 신문에 운동권의 사상동향에 대한 특집기사가 나간 직후, 그자가 일단의 학생들을 몰고 우리 신문사로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기사는 정부기관의 발표를 토대로 편집부에서 약간 가필을 한 것으로 우리 회사가 책임질 기사도 아니었다나는 그자가 편집국에 들어와 안하무인격으로 국장의 책상을 치면서 소리쳤던 내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당신들 군사정권에 빌붙어 무슨 큰 권세나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는데, 정신들 차려! 세상이 변하고 있다구! 언론기관이라면 언론의 책임이 뭔지 알아야지. 아무리 관급 기사라지만 엉뚱한 사람 이름들은 왜 집어넣어? 당장 해명기사 내지 않으면 확 불을 지르겠어. 어차피 우리야 모든 걸 각오했으니까. 당신들, 젊은 학생이 성당 꼭대기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한 그 숭고한 뜻을 그렇게 왜곡해야 되겠어? 그 학생의 통곡소리가 들리지도 않아? 당신들은 사람도 아니야. 빨리 대답해. 불 지르기 전에!”

그는 아예 울고 있었다그의 주위에 서 있는 살기등등한 표정의 학생들은 신나통을 들고 있었다. 그 경비 삼엄한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불을 질러대는 지독한 극렬분자들이 하려면 못할 일도 아니다 싶었다. 사장 이하 전사원들이 전전긍긍해야 했다그런데 사장의 명령에 따라 편집국을 점거하고 있는 그들을 구슬러 별일없이 사옥 밖으로 나가게 하는 역할을 내가 맡아야 했다그때의 굴욕감이라니내딴엔 갖은 아양을 다 떨어 그들을 회사 밖으로 나가게 하는데는 간신히 성공했었다. 운동권치곤 꽤 무른 친구들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회사 정문을 나서자마자 출동한 전경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해야 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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