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회향 (2)

소설 ‘애정산맥’

16. 회향 (2)

관리자 0 667 2020.08.10 17:12

16. 회향 (2)



그때 나는 그제서야 아버지가 영영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망연자실 비탄에 잠겨 있어, 이모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에도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고 덤덤했을 뿐이었다그런데 녀석이 자라면서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오고 이모도 유별나게 나와 상경을 묶어두려는 태도를 보이곤 했기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혹시?’하고 생각하게 됐던 것이다그랬는데 조 사장이 먼저 너희들이란 복수로 우리를 묶어두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상경이야 어리니까 민감하지 않을 수 있다 치더라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모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나는 그때 순간적으로 두 가지 추론을 했었다. 하나는 무골호인인 조 사장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용인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냥 습관적으로 너희들이란 복수가 튀어나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경자 누이를 염두에 둔 말일 수도 있었다아무튼 그날 상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지만 그 생각 때문에 별로 음식맛을 느낄 수 없었다.

 

이모의 빨치산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데모 때문에 휴교가 되어 나는 전주에 내려갔었다. 그런데 이모가 난데없이 내장사에 가자는 것이었다. 조 사장한테 시집온 뒤부터 이모는 천주교회에 다니고 있었기에 갑자기 절에 가자는 말이 의외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신록이 막 우거져가는 초여름의 내장산 경치는 싱그럽게 우거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모의 관심은 그런 경치가 아닌 것 같았다. 오로지 내장사 경내로만 바삐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이쯤 될까, 너희 아버지 차 대장과 걷던 길이?”

뜬금없이 이모가 말했다.

무슨 말이야, 이모?”

내가 너희 아버지한테 잡힌 곳이 바로 이 부근이잖아.”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나는 그때까지 이모가 빨치산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가슴속에 묻어두고만 있었지,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않았고 더 자세한 얘기를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었다. 이모의 말을 듣고 이모가 내장사에서 아버지의 부대에게 생포됐었구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니 뭘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요량이 서지 않았다절 경내를 다 둘러본 뒤 요사채 댓돌에 앉아 이모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땐 다 불탔었었는데 많이 변했구나.”

이모, 여기 그 뒤로는 처음 오는 거야?”

,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무슨 말이야, 그게?”

불쌍한 친구들이 자꾸 꿈에 나타나 괴롭다. 많이두 죽었지, 왜들 그렇게 서로 죽여야 했는지…….”

그럼 왜 그런 생활을 했어? 이모는?”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무심한 듯 말했다

그런 생활? 사실 생활이랄 것두 없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어리석었던 거야. 모두가 어리석었어…….”

잠시의 틈을 둔 뒤 이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린 이미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제발 쫓아오지만 말아다오, 이게 우리의 기도였단다. 그러다가 오도가도 못한 채 차 대장에게 잡히고 말았지.”

그때 빨치산들이 마구 자살들도 했다면서?”

누가 그러대?”

이모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한 말이 특별히 근거나 출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기보다 쉬운 건 없단다. 네 아버지 돌아가신 걸 보려무나. 그러나 살게 된 사람은 살게 된 대로 길이 있다고 네 아버지가 말했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 있어.”

그 길이 어떤 건데?”
어떤 길이냐고? 사람사는 길이지.”

뭐 그리 시시한 대답이 있어?”
시시하다고? 사는 게 시시하다고? 너도 이제 곧 알게 될거야.”

그때의 이모가 하던 말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처연한 분위기 때문에, 또 아버지에 대한 나의 상념 때문에 더 이상 따지고들 기분이 아니었다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의 경치를 감상하였다내장사의 장엄한 모습이 우리 앞에 있었다.

 

태산준령 고개 험한 고개 가시덤불 헤치고서

시냇물 굽이돌아 이 먼길을 왜 가는가

아리랑 아라리요 아이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정든 산천 정든 사람 떠나고 싶어 떠나는가

내 고향 앞산에 두고 내 설움은 뒷산에 묻고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다시 오마 다시 오마 기약해도 언제나 다시 오랴

내 고향은 달그림자 내 한숨은 별그림자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절절히 감겨드는 이 노랫가락은 변형된 아리랑으로 어떤 이가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이 노래를 들어보니 그 옛날 빨치산 활동을 하던 이모의 모습이 떠오르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 본 소설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는 콘텐츠입니다차일혁기념사업회 또는 사단법인 후암미래연구소의 승인 없이 콘텐츠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변경번역출판방송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 저작권법에 의해 법적 조치에 처해집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