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회향 (1)

소설 ‘애정산맥’

16. 회향 (1)

관리자 0 657 2020.08.10 17:09

16. 회향 (1)



마침내 정아 이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됐다며칠째 이모에게 가본다 가본다 하면서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뒤 영 풀리지 않는 의문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들고가서 이모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영 틀린 일이 된 것이다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이모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었다. 그래서 마음을 푹 놓고 있었는데, 그런 안이함이 이런 낭패를 당하게 하고 만 것이다바로 지척에 있으면서도 이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다니……꼭 이모의 임종을 지키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겸사겸사해서 회사엔 휴가원을 내놓고 벌써 닷새째 출근하지 않고 있던 내가 아니었던가.


이모는 어제 아침 나에게 전화까지 해왔었다. 물론 옆의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을 테고 오랫동안 통화하지는 못했지만 이모의 말소리와 정신상태는 또랑또랑했었다이모는 오늘쯤 퇴원해서 전주집으로 가게 될 지도 모른다고 했다마지막 임종을 집에서 맞으라는 병원측의 배려려니 싶었다. 그래서 더 안심을 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병실 안에서의 쇳소리가 아닌 그 또랑또랑했던 이모의 말소리는 코와 목에 부착했던 호스를 이모 스스로가 떼어내고 전화했기 때문이었다. 호스를 떼어낸다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일임에도, 그렇게 하고서라도 이모다 굳이 전화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모는 내가 며칠째 회사도 출근 않고 아버지와 당신의 기록과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할고 있었다옆에 분명히 누가 있을 텐데도 이모는 엉뚱한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차 대장과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사랑을 했어. 태민아, 이 점 잘 알아둬. 그분은 세속의 상식을 초월한 대범한 분이셨지만 세속의 도덕률에도 한점 어긋남 없이 깨끗하게 사셨던 불꽃같은 분이셨어. 그분은 부끄러운 게 없는 분이시란다. 알았니?”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여름을 재촉하는 봄비였다나는 정아 이모의 일기 가운데 쓰여 있는 그녀가 애송하던 노래의 가사를 읽고 있었다.

 

불러도 주인없는 임의 모습 찾아서

외로이 가는 길에 낙엽이 날립니다

들국화 송이송이 그리운 마음

바람은 차가운데

어드메 계시온지 거니는 마음

님의 모습 찾아서 이 마음 그리움을

내 어이 전하리까

 

이모답지 않게 조금은 치졸하고 유치한 가사의 노래를 좋아해 일기에까지 옮겨놓았구나 싶었지만 아버지의 얼굴이 영롱히 떠오르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그때 전화벨이 울렸다상경이었다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가라앉아 있었다.

형님, 어머니께서 조금 전에 운명하셨습니다.”

뭐라고? 어제까지 그렇게 또랑또랑하셨는데…….”

그게 마지막 불꽃이셨나 봅니다.”

그래, 알았어. 내 곧 달려갈게.”
이런 낭패가 어디 있담 싶었다. 이모의 임종을 보지 못한 것이 낭패인지 아니면 몇 가지 의문을 영 풀지 못하게 된 것이 낭패인지 내 속마음을 나도 짐작할 수 없었다.

 

대학병원 영안실 옆에는 벌써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직 연락들이 다 되지 않았는지 빈소를 지키는 사람들은 병실을 지키던 면면들과 별 다름없었다호경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는지 그가 영정 앞에 앉아 호곡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모습이었다나이 차이도 그리 많이 나지 않는 전실자식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나는 호경의 옆에 꿇어앉아 고인에게 향을 올렸다대학 이사장 시절 찍었음직한 점잖으면서도 화사한 사진이 영정으로 모셔져 있었다.


이모,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하고 이모를 부르려는데 목이 콱 메었다절을 하는 내 손등으로 닭기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갑자기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이모에게 그녀가 꼼짝못할 질문들을 들이대고야 말겠다고 며칠 동안 벼르던 나의소치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올 향 연기에 실려 이승을 떠나면 그만인 인간의 무게를 저울로 달고 자로 재듯 가늠하려 했던 나의 요량이 너무도 부질없고 철없는 것같이 느껴졌다나는 한참을 엎드려 오열해야 했다충주 시대를 비롯하여 이모와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방학 때면 전주 이모집에 놀러가곤 했다. 내가 내려가면 이모는 회사일의 바쁜 일정 중에서도 꼭 사나흘씩을 할애해 온 식구들과 함께 변산반도며 무주 구천동 등으로 피서 여행을 마련해주곤 했다이모는 그때 벌써 대화제지의 실질적 경영주였다. 이모는 사업에 있어 놀랄 만한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다. 조 사장은 허허 웃으면서 즐겁게 이모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정도였다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가장 기뻐했던 사람이 이모였다. 내 합격 소식을 이모가 먼저 알고 시외전화를 해주셨다. 축하해줄 테니 당장 전주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전주행 기차에 몸을 실은 나는 어머니에게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고 거짓말한 것을 빼면 날아갈 듯 상쾌한 기분이었다이모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상경을 데리고 역에 마중나와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이모는 장하다면서 힘껏 포옹을 해주었다환하게 핀 모란꽃 같은 중년의 이모에게서는 오히려 아카시아꽃 향기가 풍겼다그 무렵 꽤 커진 회사로 가서, 조 사장과 합류해 함께 전주에서 제일 잘한다는 한정식집으로 들어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조 사장은 그때 너희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했겠냐?” 고 말했다. 나는 하마터면 수저를 놓칠 뻔했다그때 나는 상경과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조 사장의 그 말이 상경과 나를 한 묶음으로 지칭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사실 나는 상경을 볼 때마다 혹시 이 녀셕이 내 동생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친형제와 같은 정을 느끼고 있었다이모는 조 사장에게 시집간지 일 년이 채 못되어 상경을 낳았다. 내가 망을 보고 아버지와 이모가 유성에서 만난 시점에서도 열 달 남짓밖에 되지 않는 시기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여섯 달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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