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구명시식 (1)

소설 ‘애정산맥’

17. 구명시식 (1)

관리자 0 1,025 2020.08.10 17:50

17. 구명시식 (1)



내가 구명시식(救命施式)’이란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후암사 법강(法剛) 스님을 통해서였지 않나 싶다. 법강 스님 이외에 다른 스님들이나 불교인사들로부터 그 단어를 들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속가의 나이로 치면 나와 비슷한 연배의 젊은 스님인 법강 스님은 불교종단 내에서는 괴짜 혹은 기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다스님은 걸핏하면

어제 구명시식을 했는데, 그 영가 대단히 세던데……. 아주 혼났어.”

어젠 참 구명시식이 잘됐어.”

하곤 했다평소에는 천진난만한 어린애 같은 그분이 영혼을 투시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라고 주위에서는 말하고 있었다


그가 법주로 있는 서울 강남의 주택가 후암사에서는 주말마다 구명시식이 벌어진다고 했다구명시식이란 문자 그대로 풀이한다면 생명을 구하는 의식인 듯 싶었는데, 법강 스님이 말을 할 때는 구명시식이 영가(靈駕)로 점잖게 표현되는 영혼, 혹은 귀신을 불러내어 그들과 대화하는 의식이란 뉘앙스가 짙었다그럼에도 처음 들을 때부터 구명시식이 불교 전래의 의식 가운데 하나라고 여겨졌는지 생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스님과 내가 알고 지낸 것은 벌써 10년쯤 되는데, 어찌 된 셈인지 나는 그가 그토록 노래부르듯 말하는 구명시식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 예식을 참관해보겠다는 생각도 안했었다사실 그가 하는 구명시식이란 것이 미신이며 일종의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아닌가 하는 의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전 인사동 거리에서 법강 스님을 우연히 마주쳤다.

어이, 차 국장! 오랜만입니다!”

떠들레하게 스님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는 내가 곧 국장이 될 것이라며 여러 사람이 있는데도 부끄럽게 나를 국장이라고 부르곤 했다벌써 3년 전부터였다.

당신 최근에 가까운 사람 초상치렀나?”

인사가 끝나자마자 스님이 물어왔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나는 놀라 반문했다바로 전날 이모의 장례를 치른 뒤가 아닌가!

당신 얼굴에 씌어 있어. 여자분이지? 돌아가신 분이……. 우리 토굴에 한번 와야겠는데, 구명시식을 해야겠어.”

이쯤 되니 나는 그의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내쪽에서 먼저 매달리고 싶었는지도 몰랐다나는 다음날 저녁에 후암사로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그리고는 집에 돌아가 불교사전을 들춰보았다그러나 가장 권위 있는 정통의 불교사전이라 일컫는 운허 스님이 편찬한 불교사전에는 구명시식이란 항목이 없었다누군가는 구명시식이 귀신과 떡을 나눠먹는다귀병시식에서 나온 말일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불교사전에는 귀병시식이란 항목도 없었다. 귀명시식’, ‘구병시식등 비슷한 그 어느 것도 나와 있지 않았다다만 천도라는 항목이 법강 스님이 사용하는 의도와 비슷한 내용으로 나와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법강 스님의 후암사를 찾아갔다그러나 나의 상상과는 달리 법강 스님이 행한 구명시식 그 자체는 한마디로 말해 망자(亡者)를 위한 법회였다부모님의 지고한 사랑과 은혜를 담은 부모은중경, 사바세계와 지옥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담은 지장경, 영가를 서방정토로 모시는 아미타불 독송이 계속 이어지면서, 구명시식이 펼쳐지는 불단은 그윽한 향내음 속에 자비와 지혜의 빛이 어우러지는 숙연하면서도 포근한 보현행원이 물들고 있었다.


법강 스님의 전언이 시작됐다.

영가이시여, 내 이제 영가와 인연이 깊어 무상계의 묘법을 다시 주리니 잘 들으시고 깊은 깨달음을 간직하도록 하소서.

지난 동안 영가가 지은 모든 악업은 모두 탐진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이제 더 깊은 인연으로 정토로 가는 영가에게는 모두 부질없는 옛이야기가 되었습니다인연에 따라 모였던 뼈와 살은 흙으로 돌아갔고, 피와 수분은 물로 화()했으며 따뜻한 온기는 불로 돌아갔고, 움직임의 힘은 바람으로 다시 변했습니다사대(四大)로 이루어졌고 영가의 육신은 실로는 거짓이요,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다했다고 결코 애석하게 여길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이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나니 그것은 모두 생멸하는 속성 가운데 멸로 가는 길입니다. 이제 생하고 멸함이 다해지면 적멸의 즐거움이 다가오는 법입니다이제 오온(五溫)의 빈 주머니 시원히 벗은 영가시여, 부디 천상에 들어 위없는 청정계를 닦아 다시 인연따라 만나게 되면 적멸의 기쁨도 생멸의 슬픔도 없는 처처안락 복락국을 만들기 위해 함께 보살도를 행하도록 합시다.

영가이시여, 그렇다그렇다 하는 마음에는 하늘과 땅이 열리는 이치가 있으며 아니다아니다 하는 마음에는 만사가 모두 다 허사인 법입니다오늘 영가는 어디에 있으시렵니까? 영가시여, 부디 깨우치셔서 무상계의 묘법 속에 계시도록 하시옵소서.”

홀연한 기합소리와 함께 놋사발이 울고 영가는 복덕국의 깊은 원력의 길에 들은 듯했다그러나 다음 순간부터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차 선생, 아버님의 영가께서도 오셨으니 인사하시오.”

법강 스님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너무도 진지하고 차분했다.

? 아버님이라뇨?”

나는 놀라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함자가 동자, 혁자 아니시오? 그 분 왼손의 두 손가락의 끝마디가 절단되어 계시네…….”

너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님의 이름이야 알 수 있다 치더라도 아버님 왼손가락 약지와 검지 끝 두 마디가 없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다아버님이 독립운동할 때 다친 것이었다그러나 이 일은 여간해서 남들에겐 알리지 않는 일이었다그것을 법강 스님이 알고 있다니……나는 세상에 이런 일도 있긴 있구나 싶었다.


뭐하시오? 인사 드리라는데도……. 곧 나가셔야 하는 바쁜 영가신데…….”

나는 쭈뼛쭈뼛 일어나 법단에 재배했다내 뒷머리로 따스한 온기가 서리는 느낌이었다.

아버님께 인삿말이라도 여쭙지 그래요.”

법강 스님이 나에게 권했다. 그런데 무슨 말을 올려야 할지 도무지 요량이 서지 않았다.

아버지!”

실로 28년 만에 소리내보는 단어였다그 말이 주는 감동 때문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님, 불효자 태민입니다. 정아 이모가 이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속의 다른 내가 말하듯 다음말이 계속해서 나왔다.

이모는 아버지를 만나게 돼서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벌써 만나셨는가 보군요. 부디 이승에서 다 못한 두 분의 우정을 저승에서라도 환히 펼치십시오.”

두 분 사이의 관계를 우정으로 표현한 것은 정말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단어였다아내와 법강 스님을 의식해서였을까.

아버지, 저는 두 분의 아픈 과거를 세상에 바로 맑혀 다시는 이 땅에 이념으로 인한 살육과 증오가 없도록 하는 일에 몰두하려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도 이 일에 찬동하고 계시겠지요. 정아 이모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부족한 게 너무 많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나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향로에 꽂혀 있는 향이 부시식하며 순간적으로 빨리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이념으로 인한 살육과 반목을 없앤다-내가 뱉은 말이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이 던져준 해답처럼 가슴으로 울려져 반추되었다그동안 내 머릿속을 뱅뱅 돌면서 무언가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던 가닥이 잡힌 느낌이었다.


법강 스님이 조용히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커다란 법열에 차 있는 모습이었다.

고맙소, 차 국장.”

무슨 뜻인지 그가 한마디 뱉더니 벌떡 일어나 나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당황해 일어나 맞절을 했다먼저 일어선 법강 스님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제 온 비에는 꽃이 피고 오늘 온 비에는 꽃이 집니다. 똑같은 비이지만 꽃이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비 때문에 꽃이 지고 비 때문에 꽃이 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꽃은 피게 되어 있고 또 지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 모두 주변상황 때문인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모두 세월의 순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범부 중생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지요. 자비하는 마음 한 자락만 있으면 인간들에게 드리운 모든 산맥을 넘을 수 있는 겝니다.”


나는 다시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스님이 하신 말은 바로 아버지가 자신의 수기 진중일기 마지막 부분에 써놓으신 말이었다그 말을 처음 읽을 때도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와 지금까지 내 가슴에 남아 있거늘, 그것을 법강 스님이 그대로 어구 하나 틀림없이 되뇌이고 있다니……내 생애 최초의 구명시식행사는 이렇게 해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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