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회향 (6)

소설 ‘애정산맥’

16. 회향 (6)

관리자 0 690 2020.08.10 17:39

16. 회향 (6)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 둘 다 자신의 생을 어렵게 이끌어온 공통점이 있네요.”

미국에서 처절하게 살아온 그녀는 동양의 신비에 이끌려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어느덧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우 가까워졌다한편 나는 나의 아버님과 정아 이모의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그러자 그녀는 혹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정아 이모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전주로 정아 이모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찾아온 나와 강혜련을 보자 정아 이모는 무척 반가워하였다. 더욱이 강혜련의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때는, 옛날 산에서 목숨을 함께 나누던 자신의 옛동료를 만난양 더욱 반가워하였다. 그때 이모는 대학이사장으로 있었다.

아버님 성함이 무엇이었죠? 어디 부대원이었는지는…….”

성함은 강성철이고, 부대는 잘 모르는데요…….”
?”

이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강성철 대원! 알다마다요. 그런데 그는 차 대장 부대에 의해 사살된 것이 아니라 국군에 의해 죽었어요.”

아니 그럼 차 대장 부대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고…….”

아니에요, 내가 정확하게 알고 있어요. 강성철 대원은 인근에서 같은 작전을 하던 군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사살되었어요.”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양 이모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강혜련은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이며 연기를 깊게 토해내었다.

저의 미국에서의 생활은 한마디로 복수에 찬 생활이었어요. 누군가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이렇게 만든 분풀이를 하겠다고 다짐하곤 했어요. 아마 그것 때문에 내가 이나마 살아 있게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군요.”


우리 셋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덧 세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아픈 역사가 조용히 걷혀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나의 직업이 가지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한양 이렇게 말했다.

이왕 기자가 되셨다면 뭔가 큰 사건을 취재해야 되지 않겠어요? 내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전 주한미군 고위 간부를 잘 알고 있는데 그 사람에 대해 취재해보지 않을래요? 한국전쟁에 대하여 우리가 알지 못한 많은 부분을 이야기해줄 거예요.”

그녀는 뜻밖에도 나에게 기자로서의 관심을 나타낼 만한 제안을 하였고 그 인물에 대한 취재를 주선해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신 아버지를 미워하고 당신을 미워하기 이전에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원망해요. 우리나라를 이념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게 하였고, 자기네들에게 유리하게 38선을 그어 두 동강내버린 그 두 나라를 말이에요.”

이모를 만나고 나오면서 문득 그녀가 내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내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10년간 지리산을 배회하셨다구요?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아시겠네요? 그 사살당한 장소를 보고 싶어요.”

 

그녀와 나는 지리산을 함께 여행했다. 23일의 일정이었다.

우리는 아버지들이 서로 목숨을 걸고 다퉈야 했던 이념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그녀 아버지의 무덤은 아버지의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지리산 그 자체가 그녀 아버지의 무덤이었다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빨치산들의 피가 맺힌 세석평전을 횡단했다6월초 늦은 철쭉은 핏빛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마침 핏빛 석양이 지고 있었다.

대자연에 압도된 우리는 말없이 그 장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내가 공비가 되어 도망쳐볼 테니까, 당신은 토벌대가 되어 나를 한번 잡아보실래요?”

그럴까?”

나는 유쾌하게 웃으며 앞서 달아나는 그녀를 뒤쫓아갔다그녀가 불꽃 같은 석양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쫓아가던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 그녀를 재빨리 따라잡았다 그리고는 뒤돌아서서 그녀를 덥석 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억누르고 절제해왔던 감정이 와락 분출되면서 우리는 석양을 배경으로 서로를 한껏 탐했던 것이다그것은 거대한 대자연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향연이었다.

 

그녀는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우리는 부끄럽지 않았다. 그리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우리는 서울역에서 헤어졌다. 두 사람의 만남을 가슴속에 남을 화려한 축제로 간직한 채 영원히 헤어졌던 것이다나는 출판사에 연락해 출판을 보류하라고 일렀다한많은 비극의 시대를 증언하는 수기라면 더 많은 얘기를 담아야할 것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그때의 깨달음이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영감 같은 게 작용했던 모양이다. 만약 아버지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담은 그때의 진중일기를 그대로 출판했더라면, 나는 아버지에게 씻을 수 없는 불효를 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나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며 나는 아버지의 수기를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버지의 진솔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기록으로 만들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드리는 약속이었다. 또한 그것은 정아 이모에게 올리는 맹세였다그로부터 1년 뒤 나는 만나기 어려운 신비한 인물이라고 알려진 전 주한 미군 고위간부의 인터뷰에 성공하였다. 그는 30여 년 만에 한국동란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드디어 입을 연 것이었다그리고 그것은 대단한 특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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