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회향 (5)

소설 ‘애정산맥’

16. 회향 (5)

관리자 0 652 2020.08.10 17:33

16. 회향 (5)



을지로의 어느 찻집에서 처음 그녀와 마주앉자마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동요를 느껴야했다. 생전처음 사람과의 첫 만남에서 심연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충격을 맛보았던 것이다그녀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은 숙명적으로 간직하고 있던 애증(愛憎)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모습은 무언가를 잔뜩 다짐한 듯하였고 나를 얼마간 계속 노려보는 듯했다나는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머뭇머뭇했다. 그러자 강혜련은 먼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렇게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었군요. 원수의 아들딸들이……

나는 괜히 죄인이 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참 이상하군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만나보니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는다는 것이…….”

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더욱 어찌할 줄을 몰라하자, 강혜련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담담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당신이 어렸을 적 경찰서장 아들로 대우받고 살 때 나는 이 집 저 집 다니며 손가락질 받았지요. 빨갱이딸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어요.”
그녀는 담배를 한 개피 피워물었다.

일찍부터 술집을 전전했죠. 어쩌다 백인병사를 만나 정을 나누다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낯선 땅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생활하게 되었을 때, 더욱 더 힘들었던 것은 한국에서와 달리 나를 마치 하녀취급하며 구박하는 남편이었어요. 자신이 마치 혹을 하나 달고 미국에 온 것처럼 나를 귀찮아하며 못살게 구는 것이었어요. 견디다 못해 이혼하고 악착같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어요. 미국에서 나같은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궂은 일밖에는 없었지만, 그걸 마다할 형편이 못되었죠. 어느덧 생활이 안정되자 나는 못 배운 한을 풀고자 그곳에서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혼자 힘으로 나왔어요.”


그녀는 잠시 자신의 말을 멈추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이렇게 악착같이 살면서 내가 그때마다 느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아버지를 죽인 당시의 토벌대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그 자식이라도 만나 나를 이토록 파멸로 이끈 장본인들을 한 번 만나보고, 그들에게 원수를 갚는 일이었답니다.”

다시는 한국에 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18년 만에 오게 된 것은 아버지의 산소나마 찾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손수건으로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나의 가슴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그리고 나는 내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의 잔영(殘影)을 떨치려 죽음으로까지 달려갔던 나의 젊은 아픔을…….

 

아버지가 물에 빠져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품을 깡그리 없앴다. 심지어는 토벌대장 당시의 전투일지, 작전기록, 작전지도, 신문기사 스크랩까지도 불태워버렸다. 아버지의 손에 의해 희생된 빨치산과 그 가족들의 보복이 두려운 탓이었다그런 까닭으로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우리집은 여전히 자주 이사를 했다어느날 이삿짐 속에서 아버지의 철모가 떨어져나왔다. 이 철모는 던져도 깨지지 않아,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밥을 주는 개밥그릇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유일한 아버지의 유물이었다.

그 철모가 땅으로 떨어지며 내는 쇳소리는 아버지의 유품에서 울려나온 소리라기보다 내겐 역사의 소리로 다가왔다. 철모 구르는 소리를 듣고 울었던 며칠 후 나는 아버지 밑에서 일했던 최순경 아저씨를 찾아갔다. 그리고 지금까진 의식적으로 피했던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질문했다.


최순경 아저씨는 당시 종군기자로 있었으며 아버지와 절친했던 김만성 아저씨의 거처를 알려주었다. 당시 김만성 아저씨는 서울에 올라와 만리동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었고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상태였다아버지와 약속한 빨치산 전쟁사를 쓸 수 없는 형편이라며 김만성 아저씨는 아버지가 그 분께 맡겼던 신문 스크랩, 작전일지, 아버지의 친필자료, 일기 등을 내놓았다. 아울러 아저씨 자신이 전쟁터에서 기록한 취재수첩도 내게 주었다.

이 자료는 네 아버지가 나에게 넘겨준 것이다. 이 기록은 반공의 기록이기 전에 우리 민족의 기록이다. 네가 이 기록을 민족의 기록으로 공개해도 되겠다고 생각될 때까지 공개하지 말아라.”

그는 자료들을 건네주면서 이런 다짐을 잊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당시 나는 어리벙벙한 채 그 자료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에 진학하여 법관이 되겠다는 꿈을 부풀리며 공부하던 내게 폐결핵이 덮쳤다매일 각혈을 하면서도 병마를 이겨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던 어느날 나는 공주 금강을 찾아갔다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금강 물 속으로 나는 걸어들어갔다서서히, 아주 천천히……만감이 교차되면서 문득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는 마음과 함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그래서 나는 물 밖으로 나왔다그리고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마곡사란 절로 갔다절 앞 여관에 거처를 정하고 각혈을 하면서 개구리를 잡아먹기도 하고, 토굴을 파서 그 속에 들어앉아 온갖 민간요법을 동원해 스스로 치료에 힘썼다기적적으로 회생한 나는 절에 가 설법을 들으며 종교에 몰입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나와 연결되어 있는 아버지의 잔영에서 헤어나 독자적으로 서기 위해 늘 고심했다나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만행(漫行)을 시작했다.

 

봇짐 하나 메고 부산으로 내려간 나는 부산역전 한 목욕탕에서 3년 남짓 때밀이생활을 하였다. 학벌을 속이고 들어간 직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은 주인이 해방 후 전남도당 문화부장을 하다 625 당시 군경에 처형된 내력을 가진 집안이었는데, 홀로 남은 안주인이 죽은 남편을 위해 쏟는 애정과 존경심의 크기를 보고 나는 몹시도 놀랐다당시의 나로서는 상상이 안되었다. 소위 빨갱이에게 존경심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주인아주머니는 해방 전 일본의 어느 음대를 졸업한 재원이었는데 독일에 있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과도 친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집 둘째 아들이 부산의 모 국회의원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가 반대에 부딪쳤다. 빨치산 경력의 아버지 때문이었다나는 전부터 집안에서 잘 알고 지내던 재경향우회 사람들과 아버지가 진해경찰서장 당시 가까이 지냈던 당시 육군대학교 부총장 김재규 씨(전 중앙정보부장) 등을 동원하여 이들의 결혼을 성사시켜 양 집안을 아연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학교밖에 안 나왔다던 때밀이의 내력과 실력이 범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좌익 빨치산 집안이 옛 빨치산 토벌대장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이러니였지만, 이를 계기로 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별생각없이 넘겨보았던 아버지의 자료들을 다시 검토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그 후 10년간 지리산 이곳저곳을 누비며 당시의 격전지를 배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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