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빨치산의 자서전

차일혁의 수기

어느 빨치산의 자서전

관리자 0 1,026 2020.08.05 10:24

자서전

 

본인은 경상북도 경산군 서상동에 거주하는 오동지(吳同志) 2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당시 가정형편은, 내 땅이 없는 소작농으로 매일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정도의 빈곤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1933년 경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입학 후 3년 만에 우리 집은 학교에서부터 10리나 떨어져 있는 산곡면 전동으로 이주하였다.

당시에는 35전의 수업료가 없어서, 소학교 공부도 정한 시간에 못하고 집으로 쫓겨 오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수업료 없다고 쫓아내는 일본놈 선생 전변(田邊)이란 놈을 지금도 똑똑히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너무나 무자기(無自己)하고 명랑했기 때문에 좋지 못한 성적으로 1939 4월에 경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3년간이나 가사에 종사하다가, 1941 5월 함흥 흥남제련소에 취직하였다. 당시 나는 훌륭한 기술자가 된다는 큰 희망을 품고 취직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기술공이 아니라 석탄운반을 5개월이나 계속하였다. 여기는 공기가 좋지 않아 몸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동년 10월 퇴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즉시 동년 11월에 나는 경산공립청년훈련소에 자원 입소하였다. 당시 나는 충실한 황국신민이라 하며 애국자의 가슴을 쓰라리게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다녔다. 당시 나는 유치했다. 일본인이 된다고 성의 있게 훈련을 받았다. 나는 이러한 가치 없는 생활에 하루하루 만족하며 지냈다.

1945 8 15일 영웅적 소련 군대의 진주에 의하여 우리 조국은 일제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해방된 나도 시위자 대열에서 해방의 노래를 불렀다.

나는 해방 직전이나 해방 후나 열성적인 농민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부락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1946 10월 인민항쟁 시, 경찰서를 비롯한 군정 반동기관들과 악질분자를 숙청한 이유로 청도군 운문사로 동무들과 같이 피신하다가 46 11 3일 개놈(경찰을 일컬음)들에게 체포되었다. 여기에서 놈들이 무지하게 구타했기 때문에 윗니가 한 개 부러지고, 아랫니가 두 개 부러졌다.

나의 평생을 통하여 가장 심한 구타였다. 그리고 경산유치장에서 23일 만에 석방되었다. 유치장에서 석방되자 즉시 박영철 동무가 중심이 되어 청년 열 명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독서회에 군당조직부장 김종철 동무와 선전부장 동무가 종종 와서 우리를 교양시켜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개놈들이 우리들의 원수라는 것을 가르쳤으며, 우리 당이 무엇을 하는 당이며, 누구를 위한 당이라는 것을 기초 교양하였다.

독서회는 12월부터 47 4월까지 계속되었다. 독서회를 하는 중에 종종 삐라 투쟁도 하였다.

나는 이 독서회를 통하여 1947 6 17일 영예로운 남조선 노동당에 속한 세포원이 되었다. 입당하기 전에는 우리 당에 지방유지들이나 들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반대로 나 같은 놈들도 있고 전혀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도 있었다. 여기서 나는 당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고 감격하였다.

1947 9월에 면당 오르그(조직원)로 임명되었다. 사업과정에서 48 1월에 면당선정 부책(副責)으로 임명되었다.

공장에 침투하여 조직활동을 하던 나는 사업장의 기술부족으로 놈들에게 노출되어 지하로 숨어 비합법 공작을 하였다.

2·7 투쟁 당시 군당에서 부과한 사업을 군내 면당 중에서 제일 번듯하게 하였다.

1948 3월 군당 선전부대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는 전 인원 13명이었다. 그리고 무장은 권총 2, 단도 4개 그 외는 모두 죽창(竹槍)이었다.

당시의 우리의 거점은 주로 민주부락(대부분의 주민들이 좌익에 동조하는 마을)이고, 산으로 들어갈 때는 팔송산, 동대산 능선이었다. 당시의 투쟁과업은 주로 반숙(反肅)투쟁과 정권전복 삐라 투쟁이었다.

우리 부대가 잊지 못할 것은, 5·10 선거 반대투쟁 당시 남천면 산전동 동사무소를 기습하여 선거위원장을 비롯한 선거위원, 대동청년단 6명에게 중상을 입힌 것이다. 그리고 유격대가 잊지 못할 것은 남천면 지서습격 사건과 도로를 파괴하여 경찰기동대 트럭을 전복시킨 사건이었다. 여기서 개놈 즉사자 3, 중상자 6명이었다. 트럭은 완전히 파괴되고 무장 노획은 권총 1, 38장총 3, 칼빈 1정이었다. 당시 부대 인원 총 수는 19명이었다. 여기에서 부대 사기는 고조되고 부대 활동은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1948 5 30일 나는 경북도당에 소환되어 48 6월에 당의 지시에 의하여 월북하였다. 여기는 우리가 희구하는 자유로운 땅이었다. 수도 평양에 6 12일에 도착하여 17일 강동학원에 도착하였다.

학원에 도착한 뒤 2주 동안은 남반부에서 투쟁하던 지방동무들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싸우는 동무들을 생각할 때, 열심히 공부하여 당에 보답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나는 강동학원을 일생을 통하여 잊지 못할 것이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박치우 정치부 원장이었다. 언제나 따뜻하게 우리에게 당의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선생의 서글거리는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머리에 생생히 기억된다. 나의 학원경력은 정치반 4개월, 군사반 6개월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정치 군사적으로 약간의 토대를 닦았으며, 학원을 통하여 우리 당이 정말로 인민을 위하는 당이라는 것을 또 한번 똑똑하게 알았다.

49 5월에 당을 위하여 마지막까지 싸우리리라 당 앞에 맹세하고 제7유격소대장으로서 싸움터로 남진하게 되었다. 남진 도중 우리 부대는 적정에 의하여 계획을 바꾸어 두노봉에서 일부는 다시 월북하였다. 여기서 우리 부대는 질병자가 발생하여 부대가 분산되었다.

7월 ○○지구에 도착하여 부대 분산 후 3일간 근신처분을 받고, 소대장에서 정찰대원으로 사업하였다. 나는 지금까지의 사업과정에서 책벌은 처음이었다. 여기에서 나의 과오를 인식하고 시정할 것을 결심하였다.

1949 8월에 부대는 진출하였다. 나는 정찰대원으로서 언제나 선두에서 오대산 두노봉까지 진출하였다. 우리 부대는 태백산까지 나가지 않고 인접 부대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오대산, 계방산, 태기산 방면에서 활동하였다. 그곳에서의 전투는 조우전(遭遇戰)과 매복전(埋伏戰)이 주가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 부대는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대대적인 전투는 1949 9 20일 전투였다. 소위 오대산 토벌대대 1중대를 완전히 분산시켰으며, 이 전투에서 적 사살 20, 생포 7, 무전기 노획, M1 소총 19, 칼빈 1, 미식 기관 단총 1, 놈들의 1개 중대

잔적을 완전히 포착하였다. 이 전투에서 나는 다시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우리 부대는 놈들과 매일같이 전투를 벌여, 귀중한 전우들도 많이 희생당했다. 그리하여 삼거리 매복전, 기타 전투를 통하여 11월에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지시에 의하여 49 12월에 다시 월북하였다. 월북 도중 정족산 836 고지에서 불행히 왼팔에 부상을 당하였다. 눈이 허리까지 차이는 49 12 29일이었다. 부상당한 지 5일 만에 월북하여 수술한 결과 왼팔을 절단하였다.

당시 심각한 고민이 나의 머리를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고민은 사라지지 않고, 매일매일 더욱 심해졌다. 입원 당시부터 약 2주일간은 밥도 먹지 않고, 고향 생각만 하고 앞으로 내 신세에 대해서 울어도 보았다.

우리 당에서는 나를 위안하기 위해 여러 간부들이 자주 찾아왔고 여러 전우들이 나에게 힘을 주었다. 나는 여기서 힘을 얻고 나도 얼마든지 투쟁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1950 1 20일 퇴원하였다.

퇴원 즉시 제8 인민유격대 문화공작원으로 배치되어, 2개월 투쟁하다가, 3월말에 중앙당에 소환되어, 3 26일 남반부 빨치산에 보내는 군당연락과 중부지구 지도원으로 임명되어 공작하였다. 주로 편지를 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방송하였다.

50 6 25일 조국투쟁의 개시와 함께 6 29일 서울에 도착하여, 유격대 총사령부 무기 책임자로서 7 19일까지 공작하다가 전라북도 총사령부 임종환 부대에 편입되어 전선에 참가하였다.

당시 나는 비공식적으로 전선에 출동하였다. 부자유스런 몸으로 마선전선에 참가하여 여기서 지방유격대 동무들과 연결하여 9 20일 적 근방으로 진출하였다. 우리 부대는 창원군 천주산에 도착하여 미군 전선지휘부 무선소를 기습하여 미군 포로 9, 조선인 통역 2, 권총 2, 중기관총 1, 칼빈 1정을 노획하였고, 무전기 7대를 파괴 소각하였다.

이 기습전에서 나는 기습조 제1조장으로 활동하였다. 여기서 우리 부대는 철도 파괴, 매복 조우, 기타 투쟁을 하다가 인민군대의 조직적 후퇴에, 부대는 또다시 전라북도로 돌아와서 투쟁하였다.

우리 부대는 전라북도에 와서, 전라북도의 투쟁을 활발히 하기 위해서 전라북도 병료병단장과 참모장 등 일부 간부들의 이동이 있었다.

나는 전라북도 기동병단인 탱크병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남원, 장수, 진안, 무주 일부에서 기동하였다.

탱크병단이 편제된 이후 거둔 전과는 무기 노획 12정이었고, 기본 무장수의 3배를 증가시켰다.

대표적인 전투는 현지 기습전, 지지골 잠복전, 민래 기습전, 회문산 솔본전투였다. 탱크병단의 전투 횟수는 80여 회나 되었다.

전북도당이 3 6일 회문산 거점을 이동할 때 11병단이 덕유산으로 이동하여 부대 편제가 다시 이루어졌는데, 나는 421병단 병단장으로 임명되었다.

421병단이라는 것은 덕유산에 1951 4 21일에 도착하였다는 의미였다. 병단장으로서 약 2개월 간 투쟁하였다. 7월에 조선인민유격대 전남북군이 우리 당과 연결되었을 때 부대 편제를 다시 하여, 병단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전라북도 군당부를 두고, 전북 남부 사단, 복수 사단과 1개 독립연대와 2개 독립사단은 군단부에 직속되었고, 각 시군에 들어 있었다.

7월에 나는 전북군단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어 9월까지 활동하다가 다시 각 도의 부대가 남부군에 편입된다 하여 재편할 때 나는 909독립연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909연대가 편제된 이후에 거둔 전과는 무기 노획 1 27정이었다. 909연대는 불과 2개월 투쟁하다가, 방침이 바뀌어 다시 전북 제1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부대의 전투역량과 특성도 모르고 동계공세를 겪다가, 우리들은 원수들에게 타격을 받게 되었다.

대오(隊伍)는 분산되고 전투의식은 저하되어 분산대원들은 각기 격파를 당하였다. 공세 당시 나는 참모장으로서 부대를 분산시켰으며, 겨울 공세가 끝날 무렵 30여 명에 불과한 부대를 인솔하였다.

지금도 당 앞에 쓰라린 가책을 느끼고 있다.

52 3월 도당위원장 동무를 연결하여 지리산으로 출발하다가 백운산에서 원수들과 조우하여 위원장 동무가 부상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몇 동무는 희생되었다.

장안산에서 약 1개월 동안 치료하다가 완치되어, 4 17일 지리산에 도착하여, 5월에 전라북도 복수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는 연대장이라 해도 인원은 불과 60명에 지나지 않았다. 9월에 복수연대장 겸 전라북도 유격지휘부 부부장(副部長)으로 임명되어 현재까지 투쟁하고 있음.

본인의 전라북도에서의 상훈관계는 51년 백운산에서 공훈장을 받고, 52 5월에 국기훈장 1급을 추천받았음, 처벌관계는 없음.

1953 6

문남호(본명: 吳福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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