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아! 이현상 - 8. 아! 지리산

차일혁의 수기

제3부 아! 이현상 - 8. 아! 지리산

관리자 0 930 2020.08.04 17:20

제3부 아! 이현상


8. 아! 지리산



공고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 섬멸되었습니다.

                                                  단기 4288 4 1.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백.

 

여순반란사건 이후 7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지리산의 공비토벌은 55년에 들어서 완전히 매듭지어지고 지리산에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53 9. 내가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이하 서전사) 2연대장으로 있을 때 남한 빨치산의 총수였던 이현상이 사살되었고, 이영회 등의 빨치산 간부들이 사살되어, 지리산 빨치산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나는 서전사 수사사찰과장을 거쳐 54 9 16일 충주서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지리산에서의 공비토벌이 거의 끝나고 몇 명 안 되는 재산(在山)공비들은 망실(亡失)공비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대규모적인 공비토벌이 끝난지라 전투경찰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망실공비들과 도시로 숨어든 공비들에 대한 추적은 사찰경찰이 맡게 되었다.

충주서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충주에서도 6·25 당시 교현동 동촌부락에서 부역하였던 朴○○외 3명의 좌익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인공시절 우익단체 간부를 살해하고 만행을 저지른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수하지 않고 계속 숨어 다니다가 충주서 사찰계 형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공비토벌이 끝났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거리에는 유랑소년들이 많았다. 부모와 집을 잃고 갈 곳 없는 소년들은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등으로 연명하고 있었다그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민하던 나는, 그들을 위한 야간학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서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나의 뜻에 동감을 표시하고 월급에서 푼푼이 거둬 ‘충주직업청소년학원’ 개설에 참여했다. 부족하나마 경찰서 운동장 한 모퉁이에 판자로 건물을 짓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60명밖에 수용할 수 없는데 80여 명이 지원해 왔다. 그 중에는 나이가 스무 살이 다 되도록 국민학교를 다 마치지 못한 청년들도 있었다.

그들은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지만 배우고자 하는 열의만은 뜨거웠다. 그 중에서도 원주에서 피난 온 국민학교 5학년을 중퇴한 김영열 군과 한동수 군은 서슴지 않고 나를 원장아버지라 불렀다하루 종일 고된 일을 마치고 온 아이들이 졸지 않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나의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4년 넘게 빨치산들과 전투하면서 피로 얼룩진 몸과 마음을 씻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무렵 충주에는 전국 최대의 비료공장이 새로이 세워지는 등 재건의 기운이 술렁이고 있었다.

전쟁의 폐해로부터 재건하려는 기운이 크게 일어났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업에서 활기를 찾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이 많았다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총을 겨누어야 했던 빨치산들이 그러했고 그 사이에서 상처를 입어야 했던 사람들이 또한 그러했다.

빨치산 활동을 했던 고종사촌동생 최순자는 계속 전향을 거부하여 형을 살고 있었고, 내가 18대대장을 할 때 내 밑에서 중대장을 하던 중 좌익들에게 희생된 부모와 친척들의 원수를 갚는다고 마을 주민 50여 명을 죽인 김용운도 무기형을 언도받고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한 사람은 빨치산 활동을 하고 전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다는 구실로 주민들을 죽였기 때문에 각각 형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둘은 대구형무소에 함께 수감되어 있었다. 김용운은 수감된 이후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김용운은 매번 간수를 통해 나에게 소식을 보내왔다바쁜 업무와 야간학교 개설문제로 정신없이 지내던 나는 그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서야 겨우 시간을 내게 되었다.

김용운은 형무소 의무실에 누워 있었다그는 일어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대장님이 오셨군요. 뵙고 싶었습니다. 대장님밖에는 달리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가족과 친척들이 거의 다 빨갱이들에게 죽임을 당해버렸으니까요.

“그래 몸은 좀 어떤가?

“원수를 갚는다고 주민들을 무참하게 죽였으니 그 원귀들이 저를 못살게 구는가 봅니다. 충주경찰서로 옮기셨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이제 공비토벌도 다 끝나고 행정경찰로 돌아왔네. 이제는 나도 경찰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아. 매일같이 산을 누비다가 사무실에서 일을 하자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네.

우리는 한동안 인사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기형을 받고 몸마저 쇠약해져 있는 그를 볼 때 연민을 금할 수 없었다.

“대장님, 저는 언제쯤이면 바깥세상을 볼 수 있을런지요. 이대로 그냥 죽는 것은 아닌지…….

“약한 소리 말게. 곧 감형(減刑)이 있을 거야.

“기약 없이 형을 산다는 것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자네는 행형 태도도 좋고, 내가 여러 곳에 알아봤는데, 감형이 가능할 것 같네. 용기를 잃지 말고 기다리게.

김용운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제가 출감해도 가족들도 친척들도 하나 없는데…….

김 경위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억울합니다. 저만 이렇게 형무소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빨갱이 가족을 죽인 것이 무슨 그리 큰 죄라고 나를 가두어 둡니까? 상관이었던 대장님은 공비토벌을 한답시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왜 저만 이렇게 형을 살아야 합니까?

울부짖는 그를 달래며 나는 의무실을 나왔다. 교도소장에게 고종사촌동생인 최순자를 만나게 해 달라 했지만, 순자는 얼마 전부터 단식중이어서 면회가 되지 않았다. 형이 확정되기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신념은 확고했다. 오히려 형을 살면서 더욱 요지부동이 되어버린 듯했다.

순자는 재판을 받을 때 임신 중이었다. 형무소에서 낳은 아이는 고모부 집에서 길러지고 있었다. 면회 때 가끔 아이가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지만 전향 권유를 완강히 거부했다. 담당검사였던 최대현 씨는 신념을 바꾸지 않더라도 반항만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로 돌아오는 지프차 속에서 나는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광복이 된 조국에 돌아와 김지강 선생을 모시고 일하던 시절전쟁 초기 유격전을 펴던 시절그리고 18전투경찰 대대장과 무주, 임실 경찰서장을 거쳐 서전사 연대장으로 지리산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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