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박권상

차일혁을 기억하는 사람들

전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박권상

관리자 0 658 2020.08.03 16:33

지리산의 평화를 가져온 차일혁을 생각한다

 

박 권 상

전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2008 8 9

 

1950 6 25일 이른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을 넘어 깊이 잠들고 있던 대한민국을 기습 침범하였다. 이로써 3년간에 걸친 잔인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막이 올랐다.

미국을 비롯한 16개 자유진영을 한편으로 하고 중공 및 북한을 다른 한편으로 한 국제적 성격을 띤 한국전쟁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동족상잔’이나 ‘한국전쟁’은 딱히 1950 6 25일에 터진 것이 아니었다. 세계 제2차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이 나고 타협 불가능한 미소 양군이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할 때, 전쟁의 싹이 텄던 것이다. 그것은 해방이라기보다는 분단이었고 자유라기보다는 예속이었고 끝내는 통일의 미명하에 벌어진 공산침략이었다.

그리고 꼭 60년 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마자 여순(麗順)지역에 국군 14연대가 반란함으로써 지리산 일대 공산 게릴라전이 전개되었다. 이미 처참한 전쟁의 서곡이 울려 퍼졌던 것이다.

3년간의 전쟁은 1953 7 27일 막을 내렸다. 이른바 정전협정으로 일단 총성은 멎었지만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규군끼리의 전쟁이 멈추었다는 것을 뜻하며 이 상태는 6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공산 빨치산과 우리 군경과의 혈투는 다시 1년 이상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참으로 잔인한 싸움이었다.

사상과 이념이 맞대결함으로써 전선과 후방이 가려지지 않는 물리적인 전투가 지리산을 중심으로 되풀이되었다. 게릴라전은 전후 5년에 걸친 빨치산과 빨치산 토벌대간의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두 사람의 주인공이 확연히 등장한다. 남의 차일혁(車一赫)과 북의 이현상(李鉉相).

차일혁은 일제강점기 말엽 10대 후반의 젊은 몸으로 중국에 건너가 황포군관학교에서 단련을 받고 2차대전 막판에는 팔로군 무정(武亭) 장군 휘하의 항일 게릴라전에 참여한다. 해방 후 그는 한때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고, 이어 대부분 일선 경찰서장이나 전투경찰 부대장으로서 빨치산부대 소탕에 청춘을 불살랐다.

한 인간의 기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팔로군 조선의용대 출신이 고국에 돌아와서는 일관해서 공산 게릴라와 싸웠다. 지리산에 뿌리내린 빨치산의 두목 이현상과 일대 결전을 벌였다니 공산독재를 일찍이 포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몸으로 실천한 형안(炯眼)이 그에게 있었다.

차일혁과 이현상의 좌우 간 라이벌은 1953 9 17일 이현상이 사살됨으로써 차일혁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현상은 차일혁보다 15년 연상의 산전수전 다 겪은 공산주의자로서 이 산 저 산을 누빈, 문자 그대로 신출귀몰한 게릴라 부대의 ‘우상’이었다.

1953 2월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에 모인 경찰수뇌부들 앞에서 1년 이내에 후방 공비를 평정하라고 엄명하고, 전투경찰은 군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공비토벌에 매진하라고 지시했다.

1953 7월 휴전이 성립되지만 휴전선에서 총성이 멎었을 뿐, 지리산에서는 게릴라 전쟁이 더욱 불을 뿜었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지리산 골짜기는 최후 결전장으로 무르익었다.

그때 이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 ‘지리산 평정 없이 남한의 평화가 없고, 이현상의 생포 없이 지리산의 평정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 대통령은 심지어 이현상을 직접 만나 남한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결의까지 표시했다. 이현상의 존재가치 비중은 더 이상 웅변할 필요가 없다.

이 대통령의 판단은 옳았다. 1953 9 17일 차일혁이 이끄는 서남지구경찰대(서전사) 2연대는 지리산 빗점골 전투에서 이현상과 몇몇 빨치산 간부들을 사살하는 개가를 올렸다. 아쉬운 것은 이대통령 지시대로 이현상을 생포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닐까.

그 무렵 북한에서는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파가 종파분자로 몰려 실각했고 박헌영의 직계파였던 이현상 역시 반당세력으로 몰려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에 패배한 책임을 뒤집어 씌어 반대파를 후려치는 당파주의가 공산세력을 약화시키는 것도 지리산 깊숙이 숨어 있던 이현상의 목을 재촉한 한 단면이었다.

이현상의 사살은 영명한 차일혁 부대장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한 전경부대들이 세운 찬란한 공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현상의 시신은 서울로 이송되어 창경원에서 전시까지 되었으니 그의 죽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그의 시신은 지리산으로 반송되었는데 여기서 차일혁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죽은 ‘적장’에게 베풀어준 최고의 예의였다.

“비록 이현상은 공비의 괴수였지만 그도 이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비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마지막 가는 길에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줍시다.

1953 10 8일 차일혁부대 본부가 있던 섬진강 백사장에서 이현상의 시신이 화장되었고, 스님의 독경소리와 함께 하얀 재가 되었다.

특기할 것은 그가 끝까지 목에 걸었던 유일한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염주도 하얀 재로 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공산주의를 신봉했고 공산주의 혁명에 전 생애를 바친 셈이었다. 그러나 불교 신자를 상징하는 염주만은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차일혁 역시 5년 후, 금강에 몸을 던질 때까지 염주 알을 몸에 지녔다는 사실이다. 완강한 공산주의자도 철저한 반공주의자도 초자연의 힘 앞에서는 한낱 인간이었음에 다를 바가 없었다.

차일혁은 이현상의 뼈를 꺼내 자신의 철모에 넣고 M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 물에 뿌렸다. 그리고 권총을 꺼내 허공에 3발을 쏘았다.

이현상의 명복을 비는 조사(弔辭)였다. 또한 지리산에서 죽어간 수많은 원혼에 바치는 조사였으며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부하는 ‘나의 외침’이었다고 술회한다.

이현상에 대한 중후한 장례로 인해서 차일혁은 일부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죽고 죽이는 이념대결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차일혁의 결심은 단호하였다. 그를 비난한 어떤 경찰간부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당신도 사람이 아니오. 죽은 뒤에도 빨갱이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이제 지리산 공비토벌도 거의 끝나가고 있소. 나 역시 많은 공비를 토벌했지만 그들 역시 같은 민족이 아니요? 내 고향 이웃사람일 수도, 내 친척일 수도 있지 않소. 당신은 죽어서까지 공비토벌하러 다니겠소?

그의 인간성이다.

대의(大義)를 위해 죽고 죽이는 판에도 동일민족을 향한 열정, 그보다도 휴머니즘에 젖은 고결한 인격을 잃지 않는, 그러나 강인한 인간이었다.

이현상이 죽은 지 두 달, 마지막 빨치산의 거목 이영회(李永會) 부대가 전멸했다. 사실상 지리산에 대규모 작전이 끝난 것이다. 1955 4 1일 간단한 공고문이 지리산 일대에 나붙었다.

 

“공고. 이제는 평화의 산 그리고 마을. 안심하고 오십시오. 지리산 공비는 완전히 섬멸되었습니다. 단기 4288 4 1일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백.

 

이승만 대통령이 1953 2월에 내린 엄명 ‘1년 내에 공비토벌을 완료하라’는 지엄한 명령은 이루어진 것이다. ‘지리산 평정 없이 남한의 평화 없고 이현상의 생포 없이 지리산의 평화 없다’는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서남사 전투대장 차일혁의 존재가치가 빛을 뿜는다.

그 후 그는 진해 경찰서장을 거쳐 공주서장으로 전근, 한때 평화와 안정을 누리다가 뜻하지 않게 금강의 큰 물결에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1958 8 9일의 일이다. 겉으로는 수영하다가 급한 물살에 빠져 익사한 것이 되었지만 인간적인 고뇌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도 나돌았다. 이미 신변정리를 끝냈다는 것이 사후에 밝혀졌으니 말이다.

 

38년간의 짧은 생애에 그것은 너무나 고귀했다. 자살이냐 아니냐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다만 평소 그가 밝힌 사생관(死生觀)이 일말의 열쇠가 된다.

아직 빨치산 토벌작전이 한창일 때, 어느 친구가 ‘공비토벌이 끝나면 무엇을 하실랍니까?’하고 물었을 때 그의 답변은 담담했고 의미심장했다.

“나는 공비토벌이 끝나면 깊은 산속의 절에 들어가 이념의 대결 속에 짓밟힌 무주고혼(無主孤魂)의 명복을 빌고 내 몸에 스며든 피비린내를 씻고 싶습니다.

지리산 공비를 평정하고 남한의 평화를 가져온 영웅도 따지고 보면 한낱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50여 년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와 번영의 뒷전에는 생사를 걸었던 수많은 ‘영웅’들이 있고,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이 쌓아올린 공든 탑이 있었다. 역사의 교훈이다.

인간 차일혁은 이 두 얼굴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한 번도 그를 본 일이 없지만 그의 용감무쌍한 명성을 들었고 도량 넓은 그 인간성에 매료되었다. 그의 53주기에 새삼 고인의 명복을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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