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종합학교장 박종환

차일혁을 기억하는 사람들

경찰종합학교장 박종환

관리자 0 661 2020.08.03 16:31

차일혁은 문화경찰이며 영웅이다

60년 넘게 경찰 역사를 지켜본 경찰종합학교에서 30년 경찰생활을 되돌아보며

박종환

20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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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 경무관이 생을 마감한 지 꼭 반세기만인 2008 10 15일 정부는 문화훈장 서훈자 25명을 선정하였는데, 10 18일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경찰공무원으로서는 최초로 차일혁 경무관에게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화엄사 등 名刹을 사수하고, 名唱 임방울 등 판소리 보존, 영화 『애정산맥』 제작 참여, 학도병가 작사 등 문화활동에 대한 특별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보다 앞서 2008 6 5일 문화재청은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라는 책을 통해 차일혁 경무관의 공로를 담고 아울러 감사장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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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 경무관은 홍성공업전수학교 시절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발언을 하였던 한 조선인 교사를 체포하려던 일제 고등계 형사를 때리고 도피생활을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차일혁 경무관은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민족주의자 지강 김성수선생을 만나 조선의용대 활동을 하면서 태항산에서의 전투 등 크고 작은 항일 전투에 참가하며 청춘을 불살랐다. 해방 후 만주에 있던 조선의용대 출신 대부분은 북한군 또는 중국 팔로군이 되었지만 차일혁 경무관은 주저 없이 자유민주주의를 택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경찰에 투신한다. 당시 경위 이상 경찰관 대부분이 일경 또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으나 차일혁 경무관은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이은 몇 안 되는 경찰 간부였다. 차일혁 경무관은 동료들의 질투와 경쟁의식에 시달려야 했으며 상사와의 대립은 항상 그를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사나이로서의 기개와 배짱이 대단하여 술자리 등에서 상사가 일본 노래를 부르면 술상을 걷어차서 파하게 하는 등 강렬한 민족의식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차일혁 경무관의 경찰생활을 매우 힘들게 하였지만, 그는 절대고독의 상태에서 자신의 민족정신을 지키면서 살아갔다. 중국에서의 항일운동경력을 바탕으로 독립활동의 정통성을 갖춘 경찰 지휘관이었던 차일혁 경무관은 일선 서장 재직 중 부하 경찰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의 기관장과 주민 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이들과 격의 없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차일혁 경무관의 삶의 철학을 엿보게 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전라남북도의 경계에 있는 갈재에서 차일혁 경무관은 당시 눈물의 여왕이라 불리며 이름을 날리던 백조가극단의 전옥 단장과 약간의 실랑이를 벌인다. 18대대에 의해 빨치산의 총격으로부터 구출된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겨우 안정을 찾았을 때 차일혁 경무관은 열정적으로 전옥을 설득하여 무대도 조명도 없는 전쟁터에서의 백조가극단 공연을 끌어낸 것이다. 전옥도 만만치는 않아 차일혁 경무관으로부터 체포된 빨치산 포로의 관람 허용을 받아냈다. 차일혁 경무관과 전옥은 이렇게 영웅적 일화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빨치산의 습격으로 무대와 객석은 아수라장이 되고 겁을 먹은 배우들이 공연을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차일혁 경무관은 적이 물러갔음을 보고받고서는 결연히 말한다.

 

“지금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있지만, 빨치산과 우리 대원들이 관객으로서 하나 되어 모여 있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이 공연은 이념과 사상을 넘어선 뜨거운 민족애를 보여주는 뜻 깊고 역사적인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순간의 혼란은 숙연함으로 정돈되었고 공연이 계속되면서 잠깐이지만 고난에 찬 민족의 희로애락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차일혁 경무관은 이후 깊은 문화적 소양으로 영화 『애정산맥』의 촬영에도 관여한다. 『애정산맥』 차일혁 경무관을 모델로 한 작품이었다. 당시 차일혁 경무관은 영화제작 관계자들도 놀랄 만큼 예술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애정산맥』은 1953년 전국 극장가에서 흥행 1위를 석권하였다. 전옥과의 인연 탓이었을까?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다음의 일화를 볼 때 원래 차일혁 경무관의 피 속에는 뜨거운 문화적 소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일혁 경무관은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될 수 있으니 지리산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상부의 작전명령을 거부한다. 천년고찰을 지켜내야 한다는 강한 소신을 갖고 각황전의 문짝을 불태우는 것으로 화엄사를 지켜낸 것이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특별명령불이행이라는 이유로 징계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이후에도 차일혁 경무관은 계속하여 천은사, 백양사, 쌍계사, 금산사, 선운사 등 명찰들을 구해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1958년 조계종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曉峰)스님은 차일혁 경무관에게 감사장을 수여하였다. 많은 세월이 지난 1998 5월 화엄사는 경내에 시인 고은(高銀)이 비문을 작성하여 차일혁 경무관을 기리는 공적비를 건립했다.

 

 “절을 때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1,000년의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어이 없이 숭례문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생생히 보았던 오늘의 우리에게 차일혁 경무관이 남긴 위의 말은 여전히 살아 있는 혼으로 가슴 속에 스며든다.

 

차일혁 경무관은 칠보발전소 탈환, 고창 작전, 정읍 전투 등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던 당대 최고의 토벌대장으로 빨치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칠보발전소 탈환 작전은 75 2,000이라는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한 전투였고, 난공불락이었던 가마골 탈환은 사실상 빨치산 토벌작전의 마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과는 차일혁 경무관의 뛰어난 지략과 솔선수범을 통한 철저한 부대 사기 관리 및 전투력 유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전 중 민폐를 엄금한 철저한 원칙주의와 수복지역 부역자와 빨치산 포로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용을 실천한 것이야말로 뛰어난 지휘관으로서의 차일혁 경무관의 진가였다.

 

그러나 사실 차일혁 경무관은 토벌대장 시절 온정주의자라는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는 동족상잔이라는 극한 이념 대립의 광풍이 몰아칠 때였다. 보도연맹 사건이라는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고, 역도(逆徒)에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6·25 전쟁이 발발한 후 그 해 말까지 6개월 동안 군법회의에서만 무려 1,902건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렇게 온정이라는 단어가 사치(奢侈)에 불과했던 당시의 상황은 이현상의 가족조차 이현상 시신의 인수를 거부할 만큼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차일혁 경무관은 당시 군경 지휘관들이 통상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모두 외면했다. 적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이현상의 마지막 가는 길에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자 섬진강 백사장에서 그의 시신을 화장하여 준 것이다. 차일혁 경무관은 자신의 철모를 벗어 이현상의 뼈를 모아 담고서는 M1 소총으로 곱게 빻아 섬진강에 뿌렸다. 허공을 향해 3발의 권총을 쏘는 조사(弔辭)와 함께... 당시 이 일을 트집 잡아 차일혁 경무관을 비꼬던 某 인사에게 차일혁 경무관은 화를 내며 이렇게 맞받아친다.

 

“당신도 사람이 아니오? 죽은 뒤에도 빨갱이이고 좌익이란 말입니까? 이제 지리산 공비토벌도 거의 끝나고 있소. 나 역시 많은 공비를 토벌했지만 그들 역시 같은 민족 아니오? 내 고향 이웃 사람일 수도, 내 친척일 수도 있지 않소. 당신은 죽어서까지 공비토벌하러 다니겠소?

 

차일혁 경무관은 생포된 빨치산이 그의 뺨에 침을 뱉으며 귀순거부를 하였을 때도 그 빨치산을 용서한다. 또한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 가족과 같이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며 진심으로 귀순을 권유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심지어 파상풍으로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죽어가는 빨치산에게 부하들의 반대를 뿌리치며 본인의 피를 뽑아 수혈을 하고 그렇게 해도 차도가 없자 돼지를 잡아 껍질을 덮어씌우며 그를 살려내려 애쓴다. 적조차 용서하는 인도주의적 관용과 박애정신을 가졌던 차일혁 경무관이 아니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사랑하는 휴머니즘이 아닐까?

 

1951 6 11일자 전북일보에는 “공비토벌 중 소를 2마리 노획하였으니 주인은 찾아가시오”라는 당시로서는 아주 이례적인 공고가 실렸다. 토벌대원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 딱 맞는 노획물이었지만, 소를 잃어버린 농민의 좌절을 가슴 아파한 차일혁 경무관이 신문에 공고를 낸 것이다. 고창작전 중에는 공비가 주민들에게 빼앗아 저장하느라 저수지에 빠뜨린 벼 700가마를 저수지 물을 빼내어 주민들에게 배분하기도 하였다. 무주경찰서장 재직 시에는 전쟁으로 인해 관내 1,200호의 가옥이 파괴되어 주민들이 움막생활을 하게 되자 참호용 자재를 보급하여 주민들에게 가옥 1,000호를 지어주었고, 공비토벌이 거의 끝나 지리산에서 총성이 잦아들 무렵인 1954 9월 충주경찰서장으로 부임하여서는 충주직업청소년학교를 만들어 전란으로 부모와 집을 잃고 갈 곳 없는 유랑소년소녀들이 학교공부와 직업교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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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8 9일 어린 아들과 오랜만에 금강으로 물놀이에 나선 차일혁 경무관은 조선의용대 시절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노래를 마친 차일혁 경무관은 아들에게 수없이 치렀던 전투과정을 재현하듯 몇 차례의 수영시범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차일혁 경무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차일혁 경무관은 그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시신은 19시간이 지난 뒤 발견되었다. 물속에서 차일혁 경무관은 곰나루 근처를 도강하다 가라앉은 인민군 탱크를 끌어안고 있었다. 당시 부검의사는 차일혁 경무관의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결론지었다.

 

차일혁 경무관의 부하들 중 현재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18동지회』라는 모임을 통해 매월 18일이 되면 살아 있는 경찰의 혼 차일혁 경무관을 만난다. 인터뷰 내내 눈시울을 적시던 팔십이 넘은 차일혁 경무관의 부하에게 차일혁 경무관은 『영원한 18대대장』인 듯 보였다. 그들은 당시 서남지구 전투경찰대설치법에 따라 군과 별도로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부하가 죽었을 때 통한의 눈물을 흘리던 18대대장, 부하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자 상사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하던 18대대장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차일혁 경무관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들은 차일혁 경무관이 작전 중에는 주민들에게 절대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수복 후 어지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한 몫을 챙기려는 모리배들은 강력히 응징하였다고 한다. 故 차일혁 경무관은 2000년 조선일보사가 발표한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인물』에 경찰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이 땅의 평화를 기원하며

 

이른 아침에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다고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들은 애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고...

 

-서남지구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경무관 차일혁

 

경찰종합학교 강의동 로비에는 차일혁 경무관이 남긴 위 글이 걸려 있다. 그러나 차일혁 경무관은 항간에 빨치산 이현상을 사살한 전과를 올린 경찰 토벌대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빨치산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은 이현상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차일혁 경무관은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단역으로 처리되어 잊히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차일혁 경무관은 소신을 가진 원칙주의자면서도 경찰 외적인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을 지닌 경찰 지휘관이었다. 이념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대에, 체제 유지를 위해 살인의 면죄부가 주어지던 시대에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박애정신으로 충만했던 경찰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경찰 지휘관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그가 보여준 기개와 용기, 배짱은 팍팍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잠깐씩 낭만적인 상상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왜 우리는 차일혁 경무관에게 열광하는가? 이 책은 암울했던 시대를 살았지만, 원칙과 소신, 기개와 배짱, 이념을 초월한 민족애, 적조차 용서하는 포용과 관용의 통합정신, 인류에 대한 박애정신으로 충만했던 한 경찰 지휘관에 대해 인물 그 자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경찰의 역사가 63년을 넘어서는 지금 경찰의 역사를 더듬어 귀감이 되는 인물을 발굴·재조명하는 이 작업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뒤늦게나마 그리고 부족하나마 그의 살아 있는 혼을 지면에 담는 작업을 하게 된 것을 매우 행복하게 생각한다. 노고가 많았던 종합학교 교직원들과 조촐하게 삼겹살에 소주잔을 나누면서 문득 막걸리 한 잔에 애창곡인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리며 자연인으로서의 여유와 풍류를 즐겼던 차일혁 경무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차일혁 경무관에 대한 보다 정밀한 연구가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위대한 경찰의 영웅이자 민족의 영웅인 故 차일혁 경무관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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