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주제 : 차일혁의 해방 후 건국기와 6.25전쟁 후의 활동(1945~1950, 1954~1956) 2-8

차일혁선생 학술회의

제2주제 : 차일혁의 해방 후 건국기와 6.25전쟁 후의 활동(1945~1950, 1954~1956) 2-8

관리자 0 587 2020.07.31 15:46

3. 박애주의적 경찰활동

 

19551010(쌍십절: 중국 신해혁명 기념일), 차일혁은 당시 자유중국 총통이던 장개석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게 되었다. 중공군의 남침으로 우리나라가 통일을 못하게 되어 사람들이 중국인들을 무척 미워하고 있었다고 한다. 화교들은 대부분 중국 본토 출신으로서 다른 나라와는 대비되게 재산권에도 많은 제약을 받으며 이런저런 설움을 겪고 있던 터였다. 차일혁의 전임지인 무주에서도 화교들의 민원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해결해 주려 노력하곤 하던 터였다. 인간미가 있고, 중국에서 활동하여 중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차일혁이 시민들과 화교들의 중간에 서서 절충을 많이 했다. 충주의 화교들에게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을 해결해 주고 도움을 베풀어 준 것이 소문이 나서 화교들이 자유중국 대사관에 이야기 하여 감사장을 주었다고 한다.


4. 충주비료공장 준공식 및 공사 진행에 중추적 역할

 

충주에 비료공장 건설이 추진되고 있었다. 1950년대 비료공장 건설은 우리나라에겐 중차대한 의미가 있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농업위주의 산업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전후의 피폐한 농토에서 농업생산력을 급격히 향상시켜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비료공장을 건설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마침 6.25전쟁이 끝나고 1954년부터 베이비붐이 불었다. 베이비붐은 1963년까지 신생아수가 급증해 벌어진 현상인데 인구급증현상 때문에라도 농업생산성의 급격한 향상이 필요했다. 농업생산의 향상에 당장 필요한 것은 비료였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비료공장, 수력발전소 등 중공업시설은 북한에 편중되어 지어져 남한의 사정은 형편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당장 이런 시설의 건설이 시급했다.


비료공장을 지을 다른 이유는 중공업산업의 기초를 닦는 일이었다. 비료공장은 중공업육성에 가장 시급하면서 가장 기초적인 시설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비료공장을 지어야만 했다전쟁에서 벗어나 먹고라도 살아야 하는데 농사지을 비료를 미국의 원조대금으로 사서 충당해야 했다. 우리 정부는 미국정부에 원조자금으로 비료를 사서 주지 말고, 비료공장을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으나 미국은 번번히 비료를 사서 쓰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계속되는 우리의 요청에 미국도 어쩔 수 없이 비료공장건설에 찬성하였다.


충주비료공장은 변변한 경제력이 없던 지금의 아프리카 최빈국과 유사한 우리나라에 2,000만 달러라는 거액의 외채와 당시 원화 15천만원의 건설비로 들이는 대규모 공사였다. 그 당시 1달러당 원화의 환율이 50원인데 2,000만 달러는 원화로 환산하면 10억원이다. 거기에 원화 15천만원이 추가되었으니 115천만원의 공사비로 시작한 것이다. 1955년 총예산액이 1431천만원이었다. 전체 예산액의 8% 정도가 충주비료공장 건설이 투입되었다. ‘55년도 수출액은 11만 달러로 수 출은 거의 꿈도 못꾸는 상태로 그 당시 정부가 국내의 식량문제 해결과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사업인지 추측해 볼 수 있다


2014년 총예산이 357조원이다. 총예산의 8%로 환산하면 현재기준 2856백억원짜리로 환산할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완공되는데 공사비가 384억원이고 그 당시 총예산이 4,327억원으로 예산의 8.8%가 소요되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비견되는 어마어마한 공사가 1955년 충주 일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공장은 충주 목행리에 15만평의 큰 규모로 건설을 착수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을 대상으로 한 공사인데 충주는 인구 14만여명의 작은 도시였다. 이 중소도시에 어마어마한 공사판이 벌어진 것이다.

온 충주가 모두 이 공사에 매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규모 인력과 관심이 투입되고 있었다.


차일혁의 경찰서장으로서의 주된 임무 중 하나는 이 공사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경비 및 치안관리를 철저히 하고 공정하고 청렴하게 공사관련 민원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차일혁을 얼마나 신임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미국의 원조로 지어지다 보니 미국회사가 건설을 맡게 되었다. 그 미국회사의 감독관리와 고문관, 그리고 경찰과 군부대의 고문관으로 있는 미국인들이 경찰에 협조를 구할 일이 많았다미국인들은 한국인 노무자들의 노무관리에 골치를 썩이고 있었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차일혁 충주서장이 해결하곤 했다.


차일혁은 국가자본육성의 강력한 의지로 노무자들에게 대응하는 한편, 광복 후 전주에서 근무했던 삼성제사에서의 노무관리 경험을 살려 온건한 대응책도 같이 구사하여 착공 초기의 노사갈등문제를 무리없이 해결하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또한 공사현장 주변에 기생하는 조직폭력배들이 공사현장 근처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했다. 조직폭력배들은 차일혁 충주서장이 무서워 공사현장 근처에 나타나지 못했다고 한다. 워낙 대공사 이다보니 타지에서 수많은 근로자들이 건너와 공사에 참여했기 때문에 사고도 많았고 범죄도 많았다. 차일혁은 이런저런 공사 관련 일들을 잘 처리하였다.

 

충주비료공장 기공식이 19551022일에 있었다. 미국측 관계자와 당시 이기붕 국회의장이 내빈으로 참석했다. 프로펠러 비행기에서 내리는 이기붕 국회의장을 차일혁이 맞았다. 충주비료 공장 건설에 충주경찰서장의 기여가 크다는 보고를 받았던 이기붕은 그 사실을 기억해 내고, 거수경례하는 차일혁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195499일부터 19562월 충주경찰서장으로 임기를 마친 차일혁은 진해경찰서장으로 발령받아 충주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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